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윤민혁(가명)씨가 자신의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5월 13일까지 50일간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였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도장

내가 다니던 학교엔 장애인이 모두 세 명이었어요. 한명은 등이 굽었고, 한명은 다리 한쪽이 짧아서 발을 절었고, 또 한 명은 나.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는데, 그때는 지팡이 잡고 돌아다녔어요. 학교는 부모님이 데려다주셨고. 아버지가 도장 파고, 시계 수리 하는 일을 하셨는데,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너는 이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지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는다고 해서 남들보다 3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사실은 학교에 가기 싫었어. 아니 가고는 싶었는데, 애들이 하도 절뚝발이 온다고 놀리니까. 또 남에게 도움 청하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도 도장을 파려면 한자는 알아야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갔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어요. 시계고치고, 도장 파는 거, 전자제품 고치고. 중학교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놀림 받는 게 싫어서 망설였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에 반 정도 등수로 붙었어. 그때는 떨어지는 애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다녔어요. 배우고 나니 욕심도 나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섬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육지까지 나와야했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아버지 79년도에 돌아가시고 졸지에 가장이 됐어요. 그때부터 기술 배운 걸로 자영업해서 살았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두 집 살림을 했어요. 3남 2녀 중, 남동생 2명은 새어머니 자식이에요. 새로 들어오신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연이어 죽고, 어머니하고 나하고 동생들을 다 떠맡았죠. 어머님은 장애인이었어요. 내 동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래서 장애 수당이랑 생활비 나온 거, 내가 도장 파서 번 돈으로 동생들 다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출가도 시켰어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한테는 안 쓰셔도 걔들한텐 다 퍼주셨어요. 내가 매번 ‘우린 뭐 먹고 사냐, 이러다 거지된다’고 해도 듣지 않으셨어요. 또 항상 일을 하셨어요. 생활비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채소, 배추, 나물, 파, 가정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다 키우셨어요. 그러다가 자궁암에 걸리셨는데, 그러면 가만히 계셔야하는데 그렇지 않으셨어요. 뭐라도 해야 한다고, 남의 밭 빌려서 계속 채소를 키웠죠. 수술 받은 뒤 2년 간은 괜찮았는데, 수술 받은 게 재발된 다음에는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2003년도에 돌아가셨죠. 어머님 돌아가시고는 살기 어렵더라고요. 가족들이 배가 다르니까 골치도 아프고, 동생들 하고도 자주 싸우게 되고. 막내 동생은 카드를 좋아해서 계속 사고를 치는 바람에 제수씨는 도망가고. 어머님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삶에 대한 미련이 없더라고요. 해서 술로 살았어요. 술로 사니까 남동생이 택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저기 운전하고 다니면서 나 맡겨놓을 요양원을 찾아봤나 봐요. 어느 날 와선 태우더니 시설에 떨어뜨려 놓더라고요. 그 때 이후로 남동생들은 못 만났어요. 전화 연락만 가끔 올 뿐이고, 여동생만 한 두번 왔었어요. 적금 들어놓은 것도 하나 있는데, 남동생이 가져가서 받지도 못했어요.

여자

젊은 시절에 가정을 꾸리려고 여자들을 사겨보긴 했는데,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 동네는 이상하게 장애인들한텐 여자를 안 주더라고요. 비장애인을 사귀려고 해도 장애인이라고 반대를 하고 막아놓으니 연애란 걸 할 수가 없었죠. 신세한탄 한다고 술 먹고 술집에 자주 가게 되다 보니 거기서 한 여자를 만났어요. 비장애인이었죠. 잘 해서 살아보려고 했는데,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에 다녀온다고 돈 30만원만 꿔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꽤 값어치가 나가는 돈이었는데, 그래도 저축해놓은 돈을 찾아서 줬죠. 하지만 안돌아왔어요. 그때가 27살 때였어요. 얼마 뒤에 다방에 다니던 여자를 만났는데, 거기도 똑같았어요. 한동안 치마 입은 사람들은 보기도 싫었어요. 서른 중반 되고, 다시 짝을 찾아보려고 시도는 했죠. 해서 다른 데 가서 살면 내 짝이 생기려나하고 수원에 있는 장애인 직업훈련 시설에 갔었어요. 기술 있는데 없다고 속이고 거기서 5년을 살았는데, 맞는 짝이 없더라고요. 그 뒤론 짝 찾는 것도 포기했죠.

장애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항상 찌그러진 인상으로, 목숨 붙어있으니까 사는 거지, 어디 바라보고 산 적이 없어요. ‘아 내 앞에 닥쳤다. 오늘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루가 가나’ 그런 생각으로 살았죠. 걸어도 못 다니니까 어디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하고. 좋고 행복한 걸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추억이랄 것도 없고. 하도 부딪히고 하는 일마다 막히고 그러니까 속상해서 어머니하고 자살할 생각도 많이 했죠. ‘나는 세상 살지 말래나 보다’ 하고 연탄이라도 펴서 쥐죽은듯이 가려고도 했죠. 장애를 안 가졌으면 삶이 바뀌었겠죠. 재미나는 쪽으로 쏠리고, 인생도 좀 다르게 살아졌을 것 같고.

시설비리

시설이 비리가 너무 많아요. 나눠져야 할 돈을 다른 데로 다 빼돌리고. 2005년도에는 장애수당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원장한테 가서 생활비는 생계비로 사무실로 들어간다고 치고, 장애수당은 왜 안주냐고 따졌더니 그제야 주더라고요. 따지고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수당을 줬어요. 보시다시피 누워 있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건 다 떼먹은 거죠. 또 시설가면 친척들이 많아요. 친족끼리 이사장, 원장, 선생 다 해먹는 거죠. 여기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지, 시청농성장에도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장애인이니까 만만하게 보는 거죠.

시설비리가 없으면 장애인들이 그나마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나뿐만이 아니라 나 보다 더 심한 장애인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당해야 하잖아요. 시설 비리가 없으면 모든 장애인들이 나보다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나는 시설 문제 해결되면 나와서 살고 싶어요. 시설이 싫어요. 시설 사람들 보기도 싫고 거기서 살기도 싫고. 집이라도 있으면 조그만 점포라도 얻어서 내 기술을 살려볼까 하는데, 다 돈이 필요한 일이니 잘 될지 모르겠어요.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윤민혁(가명)씨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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