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5월 13일까지 50일간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였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사고
서른 세 살이던 84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부인이랑 사이에 두 딸이 있고요.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적성에도 안 맞고, 월급이 빠듯해서 도저히 편치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현대 건설에 취직해서 85년 리비아에 갔다가 87년도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좀 더 돈을 벌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우리 부인하고 애하고 살던 집에서 연탄가스 사고가 나서 일찍 들어오게 된 거죠. 다행히 우리 식구들은 무사했지요. 들어와서 모은 돈으로 작은 연립도 사고,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제가 하던 일이 조명을 잘 받게 하기 위한 페인트 칠 작업을 하는 거였는데, 저희 식구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없었어요.
87년도 8월에 간만에 식구들이랑 원천 유원지로 놀러 갔어요. 부인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유원지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깊이가 1m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들이 여기는 물이 얕으니까 다이빙하면 목뼈가 부러져서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더라고요. 근데 내가 뭐에 씌였는지,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그 수영장에 다이빙을 한 거예요. 그때 뭐가 뚝딱 거리는 거예요. 물속에 머릴 쳐 박고 있는데, 정신은 멀쩡하고 다리가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애들은 내가 안 나오니까 잠수를 잘 한다고 생각했데요. 몇 분 후에 구조 됐는데, 마침 그곳이 개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간호사도, 의료 장비도 없었어요. 사고 후에 응급처치만 잘 됐어도 이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텐데.
이별
사고 난 다음날 아침에 중환자 실로 동서가 찾아왔어요. 그러더니 앞으로 성관계도 못 하고, 인생 끝났다고, 애들 엄마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이혼해주라고 하더군요. 사고난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땐 정말 머리에 총 맞은 것처럼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얘졌어요. 그때부터 언젠가 헤어져야하는구나 생각했죠.
머리에 추를 달고 살고, 매일 약을 먹고 수술도 두 번이나 했으니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죠. 돈 벌은 것은 얼마 없는데 한 달에 2백 만원씩 병원비가 나갔으니 모아둔 돈도 다 떨어졌죠. 돈을 못 내니까 병원에서 해줄 게 별로 없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집도 팔고 전세로 살다가 안 되겠어서 다치고 1년 반 만에 형을 불러서 방을 하나 구해달라고 했어요. 애들 엄마가 친구 만나러 나간 때 짐을 싸서 나왔죠. 놀래서 우는 딸한테 그랬죠. ‘아버지 병원에 갔다가 다 나아서 꽃피면 올게.’ 결국 그 이듬해 봄에 부인이랑 이혼을 했어요. 애들은 엄마가 키우기로 하고.
시설
혼자 사는데 참 추웠어요. 돈도 없고, 집은 창고를 개조한 것이라서 낡았고. 또 욕창이 너무 심해서 엄청 고생도 했어요. 2달간 업드려서 대소변 해결하고, 좀 아문 다음에는 엉덩이를 다 긁어내고 허벅지 살을 떼어서 엉덩이에 피부 이식수술까지 해야했죠. 결국 혼자 사는 걸 포기하고 내가 마성에 있는 사회복지 시설에 전화를 했어요, ‘나 좀 데려가 달라.’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죽은 목숨이었거든요. 가보니 완전히 군대식으로 하더라고.
아침 6시에 예배를 드리고, 밤 9시 되면 완전히 소등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손톱 발톱을 검사하고. 거기서 화장실에서 변을 보다가 자빠져서 엉덩이에 이식한 피부가 다 까지기도 했는데, 또 바로 얼마 후에는 내가 소변 호스를 꼽고 살았는데, 거기 간지 두달 쯤 지났을 때 몸에 고열이 나는 거예요. 호스가 오염이 돼서 몸에 세균이 침투한 거였죠. 거기서는 못 고쳐서 결국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했죠. 그날 이후로 배꼽에 구멍을 뚫어서 소변 호스를 꼽고 살고 있죠. 그 이후에 다시 마성으로 오지 않고 한동안 혼자 살다가 석암으로 왔어요.
석암
그때가 89년 12월이었죠. 형이 가자고 해서 갔더니 나를 맡아 주는데 2천 만원을 달라고 해서, 돈 없다고 해서 깍고 깍아서 4백 만원을 주고 들어왔어요. 형이 오면서 주소도 완전히 석암으로 옮겨버렸고요.
한 아주머니는 생활인을 돌봐요. 교통사고가 나서 요양원에 온 사람인데, 사람들이 조금씩 준 돈을 모아서 적금을 부었어요. 근데 그 적금을 타서 회장님을 준 거예요. 다른 데 보내지 말라고. 죽을 때까지 석암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치매 환자들이 있는 시설로 보냈어요, 이 아줌마는 멀쩡한데요. 그렇게 우리가 사는 시설에 파렴치 한 일이 많았어요.
또 다른 병
18년 전에 요양원에 옴이 돌았는데 그때 제가 지어먹은 약이 잘못됐는지 지금까지 피부병이 생겨서 고생을 하고 있어요. 항생제 성분 들어간 약은 아예 못 먹어요. 그걸 먹었다고 하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고 사타구니나 입술 같이 약한 데는 다 진물이 나고, 옷도 못 입고 고생을 해요. 해서 감기가 걸려도 약을 못 먹어요. 또 나이가 드니 심장병도 있어서 말하는 것도 힘들고, 가만 있으면 머리가 빙빙 돌아요.
아이들
사고 나서 병원에 있을 때 감염된다고 애들을 병실에 못 데리고 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계속 아빠를 찾으니까 우리 부인이 치마 속에 애를 감춰가지고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두 살짜리가 고개를 내밀고 ‘아빠’ 그러는 거예요. 정말 울기도 많이 울었죠. 내가 애들한테 도움이 되긴 커녕, 힘들게만 했으니.
부인하고 헤어진 후 한 번도 못 만났는데, 지난해 5월에, 헤어진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어요. 그동안 모질게 연락을 끊었죠, ‘나 죽었다. 니네 아버지는 없다’하고. 애들이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장애인인 내가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하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크겠어요. 그래서 연락도 안하고 찾지도 않았어요. 헤어진 부인이 애들을 18년 동안 키우다가 애들이 크니까 애들 동의를 얻어서 재혼을 했데요. 그리고 다행히 재혼한 아버지가 착해서 애들 대학까지 다 보내줬고요. 첫째도 대학 다니고, 둘째도 올해 사회복지과에 입학했어요. 아이들을 죽기 전에 다시 보게 돼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차민수(가명)씨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