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가 너무 듣기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워낙 몸이 약했어요. 학교 다닐 때도 몸이 약해서 차를 못 타서 아버지가 자전거로 데려다주셨어요. 그랬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심부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때부터 집에만 있었는데, 2학년 때부터는 몸이 더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뇌 위축증이라고 했어요. 뇌가 활동은 하는데 조금씩 굳어가는 병이래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이런 병에 걸렸었는데, 유전됐다고 하더라고요. 이 병은 한 대 걸러가지고 유전이 된데요.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 보고 책보고. 안 그러면 정말 무료하고, 계속 누워만 있으면 정말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근데 집에서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니까 장애인들이 나와서 매스게임도 하고, 운동경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집에만 있지 말고 시설에 와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날 이후부터 어머니한테 시설을 알아봐 달라고 졸랐어요. 사실 저 때문에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고 자주 싸우셨어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저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면서 막 소리를 지르셨기도 했고, 어머니를 막 욕하시면서 때리기도 하셨고요. 해서 그때 어머니한테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막 울고 그랬어요. 빨리 죽으라는 얘기가 너무 듣기 싫었거든요. 그리고 그때 생각엔 시설에 가면 여러 사람도 만나고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처음에 알아 본 곳은 삼육재활원이었는데, 제 나이가 많아서 거기엔 갈 수 없었고, 대신 석암에 오게 됐죠. 25살이었어요. 시설에 와보니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때 제가 있었던 방은 5명이 생활했는데, 한분은 완전히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셨고, 한분은 지적 장애, 두 분은 생각은 하는데 움직이지는 못하셨고, 나머지 한분은 풍으로 오셨어요. 모두 50~60대셨어요. 밖에도 맘대로 나갈 수 없었어요.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해서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만 나갈 수 있었어요. 맨 날 방에만 누워있었죠. 텔레비전도 방마다 있는 게 아니고 휴게실 같은데 밖에 없었고요. 지적 장애인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선생님들도 많았어요. 지적 장애인들은 대소변을 잘 못 가리잖아요. 그리고 화장실 가겠다는 말을 제때 못하니까 그냥 싸는 거죠. 그러면 목욕할 때 막 때리는 거예요. 하지만 부모님들은 몰랐어요. 부모님들이 오면 좋은 얘기만 하고, 지적 장애인들이 이르지도 못하니까. 또 우리가 알려주려고 해도 선생님들이 면담할 때 항상 같이 있으니까 말할 수가 없었던 거죠.
87년부터 석암에 있었으니, 예전부터 시설에 비리가 많다는 걸 알았지만 얘기를 못했어요. 텔레비전에서 장애수당 많이 올랐다는 뉴스는 분명 봤는데,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알고도 안주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말할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선생들한테 얘기하면 선생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듣고 있지 별다른 얘기를 안했거든요. 누구한테 얘기를 한다는 게 참 어렵고 두려웠어요.
한땐 원장님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은 원장님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 같아요. 이 사건 터지고 나서 한다는 말이 자기는 깨끗하다고 믿어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어요. 앞으로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나왔어요. 이미 이부일씨는 구속은 된 상태지만 시설을 민주화시켜달라고. 사실 지금도 선생님은 가지 말라고, 농성하러 다니고 자고 그러면 몸 상태가 더 굳어진다면서 말리세요. 하지만 내 몸 안 좋으면 전화하겠다고 그러고 나와요. 지금까지 죽어서 살아왔는데, 한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사실 시설에서 절대 살고 싶지 않아요. 갈 곳만 있으면, 주거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나와 살고 싶어요.
하지만 여기는 자유가 있어요
내 꿈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화장실도 조금만 잡아주면 갔다 오고 그래요. 어렸을 때도 사람들이 몸이 약해서 많이 도와줬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나보다 못한 사람들 많이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건만 되면 전국 일주를 하고 싶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전국을 일주한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국 일주를 하는 사람들보니까 힘이 나고 내가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오십이 넘고 더 나이가 들어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전국일주 하면서 우리 가족들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4년 전에. 어머니가 심장이 안 좋다는 건 알았는데, 돌아가신 지는 몰랐어요. 근데 꿈에 어머니가 나오고 어머니랑 하도 연락이 안돼서 누나한테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이미 한달 전에 세상을 뜨셨다고 하더라고요. 임종도 못 지키고, 아직까지 화장해 유골 뿌린 곳에도 못 가봤어요. 아버지는 광주에서 보일러 일하시면서 혼자 사신다고 하는데, 일흔이 넘으셔서 귀도 잘 안 들리시고, 눈도 안 보이시고 그러신데요. 누나랑 남동생은 결혼해서 산다는데 못 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지금은 아무도 연락처를 몰라요. 가족들이랑 찍은 사진도 하나 없고요. 기회가 되면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요.
살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비록 시청 앞에서 잠을 자고,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서명을 해달라고 말을 하다보면 입이 얼고 몸이 아파요. 하지만 여기엔 자유가 있어요. 반대로 시설은 따뜻하지만 나를 구속시켜요. 시설 밖으로 나오는 건 물론이고 심지언 방에서 어디가려고 나오는 것도 말해야 해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않고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삶이 나에겐 가장 행복해요.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정민수(47·가명)씨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