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1988년도 스물일곱에 시설에 들어왔는데, 그 즈음엔, 세 형님들은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고, 형수님과 조카들도 있었지요. 형들이 결혼하기 전엔 문제가 안됐을 테지만, 결혼을 했으니 같이 사는 것이 불편하게 됐어요. 형수님들도 계시고, 형님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조카들도 꽤 컸을 때니까요.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셨기 때문에 차라리 시설이 낫겠다 말씀을 하셨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내가 형제들 사이에서 우환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게지요. 아마도 집에 계속 집에 있었더라면 나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웠을 거예요. 내가 우리 집을 잘 아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내가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순종적 삶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시설에 왔는데, “뭐 이런 데가 다 있나”싶었지요. 대소변 못 가린다고 밥을 조금 주고, 나이어린 선생들이 노인들한테 반말하고, 가족이나 교회에서 간식 넣어주면 창고에 들어가 안 나오고 그랬으니까요. 난 입소금이 없이 들어갔는데, 입소금 내고 들어간 사람들하고 차별을 당하기도 했어요. 입소금 내고 들어온 생활인에게 준다고 휠체어를 뺏기기도 하고, 6년 동안 수발한 방에서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 때 아~ 돈이 없으니, 세상이 무섭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뿐이겠어요? 시설에서 20년을 살았으니까 별일 별일이 다 있었겠지요.
그래도 신앙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그렇게 10년을 지냈는데,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신앙인이어도 그렇지, 내 인생은 뭔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수동적으로 사는 것보다는 도전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혼자 컴퓨터를 배우고, 사람들과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인터넷을 설치하고,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엿보기 시작했어요.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근데 결론은 내렸는데 무언가를 실천으로 옮기기 힘들었죠. ‘과연 내가 시설에서 나간다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도 10년 전만해도 시설에서 나간가다는 거,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거든. 답답하지만 누가 해결해 주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으니까,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해본적은 없어요. 가족과 이야기해 봤냐고요?
가족, 이해와 부담
아버지는 십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난 임종도 못 지키고. 명절 때 집에 갔다가 알았으니까. 다들 슬퍼할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아니죠. 난 엄연히 가족인데. 근데 왜 나한테 이야기를 안했는지 알잖아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하더라도, 어차피 답은 뻔했을 거야. “그냥 거기서 살아라.” 어차피 뻔한 답을 듣게 될 텐데 노인네 걱정하게 뭣 하러 이야기해요. 굳이 이야기 할 필요 없지. 서로 부담만 느낄 테고. 그렇다고 원망은 없어요. 난 그런 거 없어. 가족들도 나름의 생활을 가져야 하니까. 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자기 생활을 못하는 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들도 각자 자기 삶을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가끔은, 차라리 가족이 없었더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설에서 뛰쳐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솔직히 시설생활인비대위 활동을 하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언론에 나간다면 혹은 시설에서 가족에게 전화를 해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골치 아파지잖아. 가족을 이해하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지만, 부담스러운 존재. 그것이 나와 가족의 모습이에요.
꿈이니까. 이해가 가나요?
막상 나가려고 하면 방법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 시설에 살면 영구임대아파트 분양도 안 되죠. 활동보조도 터무니없이 작잖아요. 그리고 가족들의 반대. 사실은 그것이 제일 걸림돌이지요. 그것만 아니라도 당장 뛰쳐나갈 텐데요.
물론 나가는데 성공하더라도 어려울 거야. 어려운건 나도 알아요. 먹고 살 걱정해야 되니까. 그건 아는데 그래도 나와야 돼. 뭐 시설에 있는 게 몸은 편할 수 있겠지요. 몸은 편할지도 몰라. 근데 그건 아니거든요. 장애인도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요. 난 개나 돼지가 아니니까. 난 사람이라고. 난 세상에서 세상과 부딪히고 살고 싶지 남의 도움 밑에서 살고 싶지나 않아요. 그렇게 단 한 달만이라도 내 나이대의 평범한 남자처럼 밖에서 살아보고 싶고, 단 하루를 살아도 밖에서 살고 싶어요. 그게 내 꿈이야.
내가 당장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해도 꿈은 버리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꿈이니까. 이해가 가나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버릴 수 없지요. 설사 그게 안 이루어진다 해도 꿈을 버릴 수는 없지.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구민호(47·가명)씨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