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지난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구성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장애인 10명이 "내가 시설에 있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면서 시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이들은 지난 3월 25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사회복지시설 비리척결과 탈시설권리쟁취를 위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주거권 특집의 일환으로 공동투쟁단측의 협조로 이날 발표된 10명의 수기를 연재한다. 공동투쟁단의 요청에 따라 생활인들의 이름은 가명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가족
엄마는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어, 나 세 살 때. 언니도 동생도 죽고 나만 살았지. 새엄마가 들어왔고 아들만 넷을 났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웠데. 아빠는 군청에 다녔는데 나이 드시니까 그만 두시고 군납을 했다가 망했어. 빚쟁이들이 막 몰려와서 식구가 다 헤어졌어요. 너도 헤어지고, 나도 헤어지고.
작년에 아버지가 찾아오셨어. 여든이 넘으셨는데 서울에 오셨더라고. 작년에 주민등록 새로 만들면서 아버지 찾으려고 했지만, 못 찾을 줄 알았지. 해서 긴가민가했어. 내가 그랬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나 버렸어.”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내가 죄가 많다.” 우리 새엄마가 나 클 때 참 구박 많이 했어. 설움도 많이 주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우리 아버지가 가끔 나 보고 싶다고 전화하는데, 새엄마가 가끔 통화하면 거기서 살다 죽으라고 해요. 아버지가 날 따뜻하면 오신다고 하시던데, 오실 수 있으시려나.
도망 1
뿔뿔이 헤어지고 얼마 안돼서 대전서 남자랑 2년을 살았어. 교회에서 누가 소개해주는 바람에. 남자가 하도 패가지고 무서워서 도망 나왔어. 남자는 노가다 판에서 일했고, 장애가 없이 멀쩡한 사람이었어. 근데 나중에 들으니 의처증이 있다고 하더라고. 술만 먹으면 하도 패서 남자가 무서운 거야, 사람이 무서웠고. 애는 배속에 들었었는데, 지워졌어. 하도 패가지고. 그래서 도망을 나왔어, 일 나갔을 때.
도망 2
그 겨울에, 그 추운데 역전으로 나왔지. 어디 가 있을 때도 없고. 그때 어떤 아줌마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러 저래하게 생겼다니까 자기 집에 가재. 여관 하는데, 집이나 봐달라고. 여관에 가서 정말 죽도록 일만했어. 그 아줌마가 당뇨병이 있어서 일을 못하니까 하루에 식구들 밥이라고 밥을 9번을 했어, 9번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 했어. 겨울 때는 정말 추운데, 연탄을 갈아야 했어. 근데 돈은 안주고 일만 시켜먹더라고. 10년 동안 한 푼도 못 받고 일만 한 거지. 날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고생이 되가지고, 그땐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인생 참 죽고 싶었어.
서울역
열차타고 도망쳤지, 서울로. 아무도,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왔지. 서울역에서 두 달을 살았지. 그땐 집구석도 없잖아요. 낮에는 괜찮은데, 밤엔 무섭고 타향 땅이야.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 서울역에서 껌도 팔고, 이것저것 장사를 좀 했지. 그땐 목발 집고 다녔었거든. 근데 88올림픽 한다고 사람들이 와서 데려갔어, 대방동 부녀보호소로. 대방동에서 두 달 인가 석 달 살다가 석암 요양원으로 보내졌어. 그때 나랑 해서 여자만 8명이 석암으로 왔는데, 아파서 가고, 설사 많이 해서 가고, 약해서 죽고 지금은 문 씨하고 나만 살았어.
딸, 미리
석암에 들어와서 애기를 하나 키웠어. 그전에는 선생님이 적어서 아이들을 다 돌보기 어려우니까 우리가 도와줬어. 엄마가 허약해서 시설에 맡겨진 아이었는데, 애기가 얼굴도 하얗고 너무 이뻤지. 세 살부터 내가 키웠어. 밥 먹이고 똥 치우고, 내가 손 수 귀저기 빼고 빨고. 아기 때부터 배로만 기어 다녔어. 몸을 전혀 못 써서 완전히 다해줘야 해. 걔가 ‘엄~마’하고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알잖아. 해서 내가 정에 푹 빠졌어. 내가 지난해 우리 미리 스물네살까지 씻겨주고 밥 먹여주고, 내가 다 했어.
근데 시설의 한 선생이 미리 살찌면 안 된다고 밥도 조금만 먹으라고 했어. 그러면서 매일 다이어트 하라고 우리를 그렇게 구박했어. 애가 먹을 만큼은 줘야하는데, 우리 미리가 친엄마 닮아서 키가 큰데, 나만 보면 애를 너무 많이 먹여서 키만 키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막 울면서 원장한테 우리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그랬지. 너무 피곤하다고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우리를 찢어놨어. 미리는 1층에 남고, 나는 2층으로 보내지고. 그 뒤 어느 날은 우리를 구박했던 선생이 애 등허리를 팍팍 팼데요. 그때 우리 미리가 시퍼런 물을 넘겼데. 왜 그랬는지 몰라. 그 소릴 듣고는 맘이 얼마나 아프던지, 아이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는 거야. 그래도 못 봤어. 우리 애기가 본래 몸이 안 좋아서 밤낮으로 병원에 자주 갔는데, 결국 지난해 갔어, 스물 다섯에. 내가 미리 병원에 있을 때 안 좋다고 해서 얼굴 보러 간다고 했는데 못 가게 했어.
미리 죽고도 병원에 간다니까 석암에 온다고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미리가 한 시간인가 석암에 왔다 갔어. 우리 식구들이 나 미리 키운 거 다 알잖아, 애기 때부터 키운 거, 그렇게 내가 그리워하던 애가 갔어. 근데 원장이 창피하다고 울지 말래. 내가 키운 자식이 가는데 내가 왜 안 우냐고요. 옆에 있던 친구가 “원장님 자식이 그렇게 되면 안 울거냐”고 따졌죠. 우리 미리하고 헤어질 때, 원장이 말 한마디를 따듯하게 안하고 천대한 걸 생각하면, 나는 우리 미리 떨어진 거 그게 너무 서러워. 우리 미리 많이 맞았다는 것도 너무 서럽고. 그게 가슴에 가장 많이 남아, 너무 서러워서 세상 살고 싶지도 않아.
소망
시설에서 살기 싫어, 나오고 싶어. 너무 지겨워 삶이, 지옥 같아. 난 시설엔 안 갈 거야. 시설에서 살고 싶다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어. 나도 머리도 있고, 인간인데, 사람들은 다 다니는데, 나가고 싶은 데로 못가고 23년 동안 내 자유로는 한 번도 못나오고 쳐 박혀 살았어. 내가 먹고 싶은 거 먹고, 누구한테 지시 안 받고,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 우리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데, 왜 그렇게 못하게 해? 우리가 죄인이야?
나오면 친구들이랑 같이 살 거야. 그리고 교회 나가서 봉사하면서 살 거야.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우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 이젠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고 까무러치는 거야.
*이 글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김상미(가명)씨가 지난 4월 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탈시설을 위한 시설생활인 증언대회에서 발표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