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씨의 아파트는 1층으로 베란다쪽 화단을 앞마당처럼 쓸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김씨의 아들이 이번 기고를 위해 모델이 됐다. ⓒ김미경

에이블뉴스는 장애인시설의 비리 운영과 인권 침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고발된 이후에 주목한다. 비리 시설에서 살아왔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시설로 전원 조치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설에서 나오거나, 집에서 독립하려면 가장 먼저 살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된 장애인들에게 거액의 주택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는 현실성 있는 장애인 주택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주거권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는 특집을 진행한다.

[내집 마련 수난기]⑥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김미경(여·42)씨

직업시설 기숙사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부터 장애인 직업시설에서 지내온 나에겐 ‘내 집’이라는 단어가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기숙사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시설 안 기숙사가 나의 안식처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설 기숙사는 내가 잠시 머무는 곳 일뿐, 나만의 편안한 공간이 아님을 알아갔다.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게으름을 피워도 주위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곳, 내 취향대로 방을 꾸밀 수 있는 공간, 나만을 위한 공간이 꼭 필요함을 점점 크게 느끼게 되었다. 생각 같아선 작은 아파트에 전세라도 얻어 살고 싶었지만 20여년 당시 20대 중반인 내가 몇 년 동안 얼마 되지 않은 급여를 쪼개 저금을 하며 살았어도 시설 주변 방 한 칸짜리 빌라 전세금인 1천 여 만원도 나에겐 꿈에도 만져보지 못할 거금이었다.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지 못했기에 부모님께 손 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고민은 나뿐만 아니라 직업시설에서 함께 지내는 몇몇의 친구들 역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와 3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돈을 모아 직업시설 가까이 작은 다세대주택을 전세로 얻기로 했다. 그 친구들 중 차가 있는 친구가 있기에 그 차로 시설로 출퇴근을 하며 저녁시간과 주말이라도 시설기숙사의 틀에 짜여진 시간에서부터 벗어나서 우리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며 살아보자는 같은 마음으로 독립생활을 서둘렀다.

전세 1천만 원에 작은 1층 다세대 주택, 방하나, 욕실하나, 주방시설이 딸린 작은 거실하나…. 4명이 살기엔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묵은 짐도 많았기에 보일러 실 작은 창고는 짐들로 포화상태였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이 나에게 최초의 편안함을 선사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었다.

우린 주말엔 자고 싶을 만큼 늦잠을 잘 수 있었고 의견을 모아 그날의 저녁메뉴를 정한 후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소등시간이 없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며 밤늦도록 각자 하고 싶은 일에 빠져 들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은 서로 의견충돌이 있을 땐 함께 자고 먹고 하는 친구의 얼굴보기가 힘들고 갑자기 하수도나 전등이 고장일 땐 서로 난감해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불편함은 우리의 자유스러운 생활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라 생각했다.

우린 서로를 이해했고 의견충돌이 있을 때도 시설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기에 단체생활의 보이지 않는 노하우로 잘 이겨낼 수 있었으며 전등이 나가거나 하는 난감한 일이 있을 땐 시설에 근무하는 남자직원들께 부탁을 했고 그 분들 또한 흔쾌히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셨기에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우리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언제까지 그러한 우리의 생활이 큰 어려움 없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친구 한 명 퇴사하면서 전세자금에 비상 걸려

우리의 생활이 3년 째 되던 해, 차를 가지고 우리의 출·퇴근을 책임지던 친구가 개인사정으로 시설 내 직장을 퇴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와 헤어짐이 슬프고 가슴 아팠지만 당장 그 친구 몫의 전세금을 빼줘야 하므로 우린 헤어짐의 슬픔도 뒤로 하고 그동안 조금씩 모으고 있던 각자의 적금통장을 깨고 부모님께 도움도 청하고 친구에게 빌리기까지 하며 그 친구 몫의 돈을 마련 하냐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또 남은 우리 셋의 출·퇴근 문제가 큰 고민으로 남았다.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소식이 시설에 알려지고 다행히 우리와 출·퇴근 방향이 같은 직원 분들의 도움으로 당분간은 출·퇴근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말 그대로 당분간이었다. 직원들은 퇴근시간이 우리 보다 늦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고 개인 사정이 있어 함께 퇴근을 못하는 경우는 타고 나갈 차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곤 했다.

장애인에겐 거주할 집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야 하고 마음 놓고 이동할 수 있는 기동력이 필수임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자동차가 필수였지만 모두들 있는 돈 다 털어 모아서 친구 몫의 전세금을 빼준 상태였기에 어느 누구든 자동차를 구입한다는 건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 받고 자신의 남자친구가 타던 차를 거의 공짜로 얻다시피 해서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구입하게 되면서 우리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맘을 맞추면서 자유로이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도 안정된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하며 공동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얻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이상 편안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음을 말이다.

별 상관없는 단어라 여겼던 ‘결혼’을 하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각자 남자친구들이 있는 우리는 하나 둘 씩 결혼 말들이 나오면서 우리의 공동생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애여성이 결혼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우리와 거리가 먼, 별 상관이 없는 단어라 여겼고 우리끼리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있을 꺼라 생각 했기에 그렇게 공동생활을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시설에선 꿈도 꾸지 못했던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할 수 있고 주말이면 남자친구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변화는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미션을 선사했다. 성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결혼이라는 현실이 우리에게도 닥치면서 지지고 볶던 우리의 정든 공간과 이별을 해야 했다.

난 결혼 하면서 부모님이 보태주시고 내가 가지고 있던 돈과 신랑이 모아놓은 돈을 모두 합쳐서 11평짜리 원룸으로 된 아파트를 2천 만 원에 구입했다. 전세를 살게 되면 전세금 올려 달라거나 할 때 힘들 것 같고 언젠가 이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싫어서 아예 구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 처음 얼마동안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내 집’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편안했다. 그 작은 공간이 나와 신랑의 최초의 왕궁이었고 행복한 신혼을 시작했지만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 작은 공간에 아기 짐을 여기저기 보기 싫게 쌓아 둘 수밖에 없었고 보행기를 타기 시작하는 아기가 좁아서 편하게 돌아다닐 수도 없을 정도로 공간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난 내가 그리 빨리 아기엄마가 될 꺼라 생각지 못했기에 아기의 공간이 필요함을 계산하지 못했기에 그 작은 아파트를 구입했던 것이다.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나로선 결혼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현실이었으므로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생겼다는 신호가 믿어지지 않았을 만큼 내가 엄마가 된다는 걸 내 자신부터가 믿지 못했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 돌이 지나면서 우린 좀 넓은 20평대 아파트로 전세를 얻었다. 훨씬 넓어진 공간에서 아기가 아장아장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흐ant하게 바라보며 언젠가 더 좋은 우리 집을 꼭 마련하자고 우리 부부는 무언의 약속을 했다.

전세금 인상 요구에 결국 무리해서 집장만

예상대로 3년이 지나니 주인이 전세금 인상을 요구했고 우린 또 이사 준비를 했다. 전세금 문제도 그렇지만 그 아파트에서 아기를 홀로 키우던 내가 너무 힘에 겨워 지쳐갔기에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힘으론 서 점점 자라면서 움직임이 많아지는 아이를 돌보기에 큰 무리였기에 지금처럼 활동보조인제도가 없는 그 상황에선 친정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다. 생각하고 고민 끝에 우리는 친정인 인천으로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아이가 좀 커서 엄마의 손길이 덜 필요할 때까지만 남편이 먼 길 출퇴근하는 고생을 하기로 했다.

그 당시 IMF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을 시기였기에 아파트 값이 많이 내린 상태였지만 없이 사는 우리에겐 그래도 비싼 집값 이였다. 인천에 친정동네역시 7천만원, 8천만원하던 23평 대 주공 아파트가 그 당시 최하 6천만원까지 거래되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무리를 좀 해서라도 지금 사두라고 적극 조언하는 바람에 우린 대출까지 받으며 그 아파트를 6천200만 원에 사게 되었다. 두 번째로 가져 보는 내 집이었다.

대출금 이자에 먼 길 출 퇴근 하는 남편 기름 값에 정말 쪼들리며 사는 게 어떤 것인지 톡톡히 경험해 보는 시절이었지만 다행히 4년 뒤 좀 오른 가격으로 팔게 되면서 약간의 몫 돈을 쥐게 되었고 또 다시 몇 년을 전세로 남편 직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해서 살다가 결혼 11년 만인 2006년 가을에 세 번째로 가져보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입했다. 이 집의 대출이자는 앞으로도 큰 부담으로 남편 급여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래도 30여 평의 넉넉한 공간에서 주변 환경 또한 만족스러운 지금의 아파트 안에서 뛰어노는 아들아이를 볼 때마다 정말 구입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아기가 생기면서 집에 대한 가치기준 바뀌어

결혼 전엔 나만의 자유롭고 편안한 공간이라면 모든 걸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니 집에 대한 가치기준이 아이의 양육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학교주변 환경과 아이가 맘 놓고 놀 수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주변시설이 집을 구입하는데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앞으로 지금 우리가족이 쓸고 닦고 꾸며가는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게 될지, 아님 또 이사할 일이 생길지 아무도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살며 느낄 수 있었던 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장애인이 비슷한 경제수준의 비장애인과 비교해 볼 때 같은 수준의 주거를 소유하기 참 힘들다는 점이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비장애 주부들은 전공을 살려 학습지 교사일이나 대리운전이며 식당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경제활동을 하며 내 집 마련의 한 몫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고 소득 비장애인 역시 만족할 수 있는 자기 집을 마련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구입 후 대출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감안한다면 소득이 적은 장애인이 자신의 힘으로만 내 집을 마련하기가 참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초등학생인 아들을 키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요즘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될 어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너희 집 몇 평이냐?”, “전세냐?” 등을 서로 물어본다는 것이다. 부모가 장애인이고 자기네 집이 없다하면 당장 그 아이에 대해 어떤 평가가 생길지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해진다.

집이 생활수준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지 않는 세상, 소유할 수 있는 집의 크기와 어디 회사가 시공한 집이라는 유명세와도 관계없이 장애의 유, 무를 떠나고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파트 투기와 같은 서민을 울리는 일이 없어진다면 비장애인과 경쟁하며 사는 저소득 장애인들의 내 집 마련이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하는 정말 꿈같은 바람을 가져본다.

[리플합시다]장애인 명칭 바꾸자? 나도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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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내주신 김미경(여·42)씨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 살고 있습니다. 에이블뉴스와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제28회 장애인의 날 특집으로 ‘나의 내 집 마련 수난기’ 공모를 진행해 현재 릴레이로 수기를 연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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