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블뉴스는 장애인시설의 비리 운영과 인권 침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고발된 이후에 주목한다. 비리 시설에서 살아왔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또 다른 시설로 전원 조치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설에서 나오거나, 집에서 독립하려면 가장 먼저 살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된 장애인들에게 거액의 주택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는 현실성 있는 장애인 주택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에이블뉴스는 제2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주거권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는 특집을 진행한다.
[내집 마련 수난기]⑤청주시 흥덕구 김명자(여·38)씨
1994년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 사람은 훤칠한 키에 비장애인이었다. 또한 인상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나는 첫눈에 반했다. 신체장애(지체장애)로 인해 사회 경험이 없던 나에게 그 사람은 나를 구제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의 시작은 원만하지 못했다.
구타와 욕설, 그리고 의처심, 성폭력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어떻게 아이는 생겨서 딸 하나 낳고 3년 만에 소송, 이혼을 해 2000년도에 악몽의 나날이었던 결혼의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동안 나는 친정에 와서 살았다.
남편과 이혼하고 친정으로
이유야 어떻든 간에 출가외인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부모님의 눈초리를 불사하고 눈칫밥을 먹어가면서 살아야했다. 다시 친정에서 살다보니 부모님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을 하시고 나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가진 욕설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도 갈곳이 없으니 시달리다가 신경쇄약에 걸리면 성모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퇴원하고 또 스트레스 쌓여서 몸이 안 좋으면 또 입원하고 이렇게 입원, 퇴원만 여러 해를 하여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다 보니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가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였다. 이혼 후 얻은 것이라곤 신경불안과 우울증이었다. 늘 생각은 자립해 친정집을 나가는 것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니 일을 못하고, 일을 못하니 돈을 벌수 없고, 돈을 벌수 없으니 늘 그 생활이 그 생활이었다. 한마디로 희망 없는 우울한 나날이었다.
수급권자 등록해 생계비 받았지만 저축은 안돼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면사무소 복지과에 국민기초생활 수급권자를 신청해 보호 1종으로 몇 년 전부터 자신의 기본 용돈을 쓰고 있다. 기본 용돈은 되는데 자립이 안 되는 것이다. 30만원의 생계비가 나오는데 도저히 돈이 모아지지 않는 것이다.
친정집에 있는 한은 건강이 좋아질 턱이 없어 보였다. 나는 늘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종이에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글로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소원을 빌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집에서 어떻게 꾸미고 살고 싶은지에 대해 글로 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0년 전에 헤어졌던 딸이 내게로 오게 됐다. 딸의 친 할머니께서 심하게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시고 전남편은 교도소에 가 있는 중이어서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의논 끝에 친엄마인 내게로 보내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어린 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10년이 지난 중학생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 모습에서 부쩍 커 버린 딸의 모습을 보면서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딸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왔다.
딸은 엄마에 대한 좋은 느낌이나 좋은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인지 반항을 했다. 그런데 딸이 내게로 온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꿈에 그리던 자립 선언을 하게 됐다. 오랫동안 친정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만 끓던 나는 드디어 이 기회가 독립의 기회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족 도움으로 원룸 얻어 딸과 독립
하지만 당장 나가자니, 모아둔 목돈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목돈을 해 주실 경제적 능력도 안 되고….
다행히도 큰 이모와 바로 밑에 남동생의 도움으로 청주 가경동 터미널 근처에 조그만 원룸을 얻을 수 있었다. 큰 이모가 보증금과 첫 달 월세를 해 주셨고 남동생이 100만원을 주면서 비상금으로 쓰라고 하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며 슬쩍 내게 거금을 건네주는데 얼마나 고맙고 뜻밖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곳 청주 가경동 원룸에 당장 급한 기본 살림(냉장고, 서랍장, 주방기구, 라디오, 행거와 옷)만 가지고 왔다. 딸 학교도 집에서 가까운 3분 거리인 서원중학교로 전학을 하여 다니고 있다. 작년 가을 11월에 이사 왔으니 이제 5개월이 되어간다.
시골에서만 30년 살다가 갑자기 도시에 적응하려니까 처음 몇 달 간은 우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오히려 도시의 편리함을 이용하며 부담 없이 살아가고 있다. 집 뒤에 공원도 있어서 약수를 떠다 시원하게 먹고 가벼운 산책도 하고 시원한 공기도 마실 수 있어서 참 좋다.
오랫동안 부모의 그늘에서 부모가 해주는 밥 먹다가 실제로 독립을 해서 딸과 함께 살아보니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과 관련하여서 막중한 책임감이 들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딸만 낳아 놓고 엄마역할을 10년이나 안하고 있다가 갑자기 아이가 엄마 엄마하면서 이거해주세요, 저거해주세요, 하는데 내 마음도 지금 어린아이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하고 저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엄마 하기 힘들다" "나 엄마 안 하고 싶어"라고 울상을 지은 적이 많았다. 남동생이 준 돈으로 딸아이의 교복을 사 주면서 지갑에서 거금 40여만 원을 꺼내 교복 값을 지불하면서 이게 엄마라는 거구나 하는 걸 처음 느꼈다. 내가 살아오면서 한번에 40여만 원을 지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욱 크게 느껴져 온 것이라 생각한다.
주택공사 임대주택 기다리는 지금 행복해
그런데 또 하나의 좋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청주로 이사 오면서 동사무소에 바로 신청한 건데 대한 주택공사에서 수급권자를 위해 마련한 내 집 마련의 기회이다. 아주 내 집은 아니고 보증금 100만 원 이하에 월 몇 만원의 임대료를 내는 조건인데 지금 월세 18만원을 주고 원룸에서 사는 조건보다는 부담 없는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임대 주택 신청자가 많아서 몇 달 걸릴 거라고 복지과에서 말했다. 그래도 좋다. 일단 신청해 놓은 상태이고 날짜가 되면 경제적 부담 없는 집으로 이사 갈 예정이니 말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고,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더니….
난 행복하다. 월세집이기는 하지만 이젠 부모의 그늘이 아닌 내 집에서 살고 또 조금 있으면 더 큰 환경으로 갈 것이니 정말 난 행복하다. 딸아이도 어서 빨리 대한주택공사에서 집을 마련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어린아이 같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고 또 하면서 사니까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다. 맞다. 자식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독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을 빨리 하면 할수록 보다 큰 일을 척척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모든 장애인이여, 이젠 자립을 선언하라! 그리고 소원을 빌어라! 꿈은 이루어진다!
*이 글을 보내주신 김명자(여·38)씨는 현재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에 살고 있습니다. 에이블뉴스와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제28회 장애인의 날 특집으로 ‘나의 내 집 마련 수난기’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원고료 10만원. ablenews@able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