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금융계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 한 신용금고에서 공채가 있었다.

“요즘 말하면 저축은행인데 48대 1이나 되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습니다.”

연수를 받고 2차도 합격했다. 나름대로 탄탄한 직장이었다. 지인을 통해 동갑내기 박홍자 씨를 만났다.

“통영사람이었는데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호감이 가는 지적인 규수였습니다.”

장병근 씨와 아내. ⓒ이복남

장모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 외는 흠잡을 데가 없어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초량에서 형님과 생활했고 그는 박홍자 씨와 결혼을 하면서 광안리에 집을 얻었다. 그는 직장을 다녔고 아내는 살림을 하면서 첫딸과 아래로 아들형제를 두었는데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열의가 대단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이애란의 ‘백세인생’이다.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에서부터 열 살씩 올라가다가, 백오십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나는 이미 극락세계 와 있다고 전해라고 한다.

나이 60세에는 저세상에서 데리러 와도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했는데 아내가 이제 경우 지천명(50)을 넘겼는데 생각지도 않은 병이 들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 즈음이었는데 아내가 아팠던 것이다.

“마침 IMF가 왔고, 수술한 아내의 병간호도 해야 했기에 명퇴를 했습니다.”

아내는 부산의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 A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했다. 당시 큰 딸은 아시아나 승무원이고 둘째아들은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에 다녔고 셋째 아들은 서울대학교 전자공학부에 다니고 있었기에 마포구 서교동에 전셋집을 마련하였다.

“딸은 비행가고 아들 둘은 학교에 가고 저는 서교동 집에서 아내를 간호하면서 A병원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장병근 씨 가족들. ⓒ이복남

아내는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병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아내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형님 집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길로 돌아가셨다. 하는 수 없이 서울에서 치료 중이던 아내와 함께 부랴부랴 부산으로 내려와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내의 병은 더 악화가 되었다.

“결혼하기 전 애틋한 연애도 없이 그냥 지인의 소개로 만났지만 아들 딸 낳고 살다보니 정은 깊어져서 아내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았습니다.”

그의 가슴은 무너지는 데 아내는 피골이 상접했고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아내가 위독해서 앰뷸런스를 불렀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영면했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다시 올 수 없는 여정의 길을 떠났다. 발병한 지 4년이 아니라 병을 발견 한지 4년 만에 아내는 떠나고 말았다. 아내 즉 애들 엄마의 죽음에는 애들도 통곡했으나 어디 그만 하랴.

아내와 함께. ⓒ이복남

“아내의 장례식 때는 눈물도 안 났습니다.” 친지들은 아내가 객사를 했으니 시신을 부산으로 옮기느냐 마느냐로 왈가왈부 했지만 부산으로 옮긴다는 것도 만만치 않아 서울에서 화장을 하고 그는 아내의 유골함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 왔다.

“아내의 빈자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술만 마셨다. 아내가 없는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눈물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잠이 깨면 다시 슬픔에 빠졌다.

“한 3년 쯤 방탕의 길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의 그런 꼴을 보다 못한 친구의 아내가 오래전에 남편과 사별한 친구 J씨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아이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술만 마실 거냐.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힐책 같은 J 씨의 말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 보니 참 한심해서 아내를 가슴에 묻고 다시 살아보자 싶었습니다.”

J 씨를 자주 만나면서 아내는 조금씩 잊혀 졌고 그에게도 봄날이 다시 오는 듯 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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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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