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우리나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별표 1은 장애인 화장실에 필요한 기본 설비로 대변기, 세면대, 손잡이, 비상벨 등을 규정하고 있다.
조문에 따르면 손잡이는 바닥면으로부터 높이 0.6 ~ 0.7 m 사이에 설치하고, 세면대의 상단은 0.85 m 이하, 하단은 0.65 m 이상으로 설치해야 한다. 비상벨은 바닥으로부터 0.6 ~ 0.9 m 사이 높이에 설치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은 휠체어 이용자가 변기와 세면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 접근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법령 어디에도 간이침대형 체인지벤치(changing bench) 또는 성인용 교체대(adult changing table) 에 대한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나라의 법적 기준은 앉아서 변기 이용이 가능한 사람을 전제로 하며, 누운 자세에서 세정·환복이 필요한 사람은 고려되지 않는다.
미국의 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 Standards for Accessible Design (2010)은 화장실 접근성의 국제적 표준으로 널리 활용된다.
이 기준은 휠체어 회전을 위한 최소 1525 mm (60 inches) 지름의 회전공간, 대변기 좌대 높이 430 ~ 480 mm (17 ~ 19 inches), 손잡이 높이 840 ~ 915 mm (33 ~ 36 inches) 등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ADA 2010 원문에는 “adult changing bench” 또는 “changing table” 이라는 별도 조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미국 주(예: 캘리포니아, 뉴저지, 미네소타)는 ADA를 근거로 자국 법률에서 공공화장실 내 “adult changing stations” 설치를 권장하거나 의무화하였다. 즉, 연방차원의 표준은 아니지만 주(州) 단위에서 체인지벤치 개념이 이미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06년부터 “Changing Places Toilets” 제도를 추진해 왔으며, 2021년 Building Regulations (Amendment) for Changing Places Toilets 를 통해 대형 공공건물에 확장형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했다.
해당 지침 (Approved Document M 및 BS 8300-2:2018)은 화장실 내 기본 설비 외에 다음 요소를 권장한다.
Changing bench (체인지벤치) : 이용자가 누워서 옷을 갈아입거나 보조자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수평면 설비.
Ceiling hoist (천정형 호이스트) : 이동 및 체위 변경 보조.
Emergency alarm system : 보조자와 이용자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설치.
이 기준은 영국 국가기술표준 BS 8300-2에 근거하며, 일반 장애인 화장실과는 별도의 공간으로 설계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 제도는 “장애인이 공공장소에서 위생 행위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권 보장” 을 목표로 한다. 즉, 체인지벤치는 단순 편의시설이 아니라 공적 생활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인프라로 위치한다.
호주는 National Construction Code (NCC) Volume One 2019 Amendment 1 의 Specification F2.9 에 “Accessible Adult Change Facilities”를 명시한다. 요건은 적정 면적의 바닥 공간으로 휠체어 회전이 가능한 면적을 확보할 것, 전동식 Changing table 또는 Changing bench 설치, 세정 및 배수 설비, 비상벨, 보조자 출입 공간 포함이다.
NCC는 이 시설을 “휠체어 이용자 또는 보조자 동반 이용자가 개인 위생 을 유지하기 위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모든 공공건물 군의 특정 규모 이상에는 이 시설을 하나 이상 갖추도록 의무화했다.
이처럼 영국과 호주는 법령 또는 기술규격 차원에서 체인지벤치를 장애인 화장실 의무설비로 승격시킨 명확한 사례를 제시한다.
유엔 경제사회국(UN DESA)의 Accessibility Design Manual (2011)은 배뇨·배변 보조장치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해 “높이 약 450 ~ 500 mm 의 수평면 을 제공하고, 보조자가 활동할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기술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위생 행위를 안전하고 존엄하게 수행할 권리가 있다”는 기본 원칙을 명시한다. 이는 체인지벤치 설치의 국제적 근거로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범세계 공식 문헌이다.
장루 또는 요루 (ostomy, urostomy) 장애인은 복부에 개구부를 통해 배뇨·배변을 수행하며, 주머니(ostomy bag)를 정기적으로 비우고 세척해야 한다. 이 행위는 서 있거나 앉은 자세에서 하기 어렵고, 누운 상태 또는 수평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국내 화장실에는 이 과정을 안전하게 수행할 만한 공간이나 설비가 없다.
요실금 또는 노령층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보건복지부의 「고령친화 공공화장실 가이드라인 초안」 (2022) 에는 “고령자 및 보조기기 사용자를 위한 의류 정리 또는 교체용 평면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언급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규격 또는 법제화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 많은 공공시설 여성 화장실에는 유아용 기저귀 교체대(baby changing table) 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모성보호와 양육 편의를 위한 사회적 합의로 보편화되었다.
이 전례는 “돌봄 및 위생 보조를 위한 공간”이 공공시설 내 필요 시설로 인정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체인지벤치 역시 특수시설이 아닌 생활필수시설로 규정될 근거가 충분하다.
영국 과 호주 사례는 ‘화장실의 확장’을 넘어 공공공간의 인권화로 해석된다. 이들은 체인지벤치 설치를 “인간의 존엄과 자기결정 권리 보장” 차원에서 법제화했다.
우리나라도 국제표준을 참고해 시행규칙에 체인지벤치 및 보조자 공간 기준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시설 확충이 아니라 장애인·노인 정책의 핵심 가치인 “자립적 생활”을 물리적 환경에서 구현하는 조치이다.
화장실은 인간의 기본 존엄이 지켜지는 공간이다. 장애인화장실이 손잡이와 비상벨로 ‘접근’을 보장했다면, 체인지벤치와 보조자 공간은 ‘존엄한 이용’을 보장한다. 이는 장루·요루 장애인과 요실금 노인, 그리고 보조인이 함께 위생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유아 교체대가 일상적 시설이 된 것처럼, 성인용 체인지벤치도 공공화장실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 한 평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외출의 가능성과 사회 참여의 문을 열어 주는 공공복지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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