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세이 칼럼니스트】 오랜만에 글을 쓴다. 정확히는 글을 쓰려고 애쓰다가 지워버리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주변의 여러 일들을 지켜보며 느낀 바, 굳은 믿음이던 것에 영향을 주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글에 주된 자괴감이 되어오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미등록 정신적 장애인으로서 써오던 글이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매너리즘(mannerism). 이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이다. 타성에 젖는다는 말과 비슷하게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미등록 자폐 당사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아직도 마음 속에서 하고 싶고, 할 이야기가 많은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처럼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부터 납득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이유를 탐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등록 자폐인의 삶이 다뤄지는 방식
미등록 자폐인의 삶을 다룰 때는 우선 복지 사각지대가 주로 이야기된다. 법적으로 비장애인이니 비장애인으로서의 기준이 매 순간 적용될 수밖에 없다. 장애로 인한 일머리,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서사가 많이 이야기된다.
그 외에는 이중공감문제와 신경다양성 등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단지 다름일 뿐이고 능력을 쓸 수 있는 적소가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신경다양성의 흐름이 국내에도 가시화되면서 종종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저런 이야기들이 다뤄지는 것이 그 자체로 꼭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양쪽 모두 나도 해 봤던 이야기이다. 다만 미등록 자폐인의 이야기를 능력주의를 벗어나 다루면서도 '비참한 신세'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싶었다.
자극적인 프레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미등록 자폐 당사자인 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폐는 장애다. 이 짧고 건조한 말 한마디
여기서는 그 장애가 영어로 disorder다, disability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까지 감안해 어렵게 생각하려는 의미도, 그 차이를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DSM-V의 공식 표기인 Autism Spectum Disorder를 존중함을 밝혀둔다.)
자폐인마다도 소통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 반목과 불화, 분열하기도 하는 것을 굳이 숨기는 것이 옳거나 정의로운 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중공감문제도 당사자 간의 다름을 단지 가려 버리는 방향이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대체로 논쟁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부분은 '자폐는 장애다.'라는 한국어 6음절이었다. 따라서 장애로서의 자폐, 자폐성 장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미등록 자폐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은 법적으로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자폐 당사자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장애인으로서의 자폐인을 이야기해야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장애의 다양한 관점과 자폐인의 자기 인식, 그리고 치료
현대에 이르러 장애는 신체 및 정신적 손상, 손실 외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된다. 대표적으로 정체성 중심 관점과 사회적 차별 중심의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대표적으로 장애인 인권의 관점에서 우리가 그간 파악하지 못하던 것들을 파악하게 해 준 점들이 그렇다.
단순히 시각장애인의 시각이 '정상'이 되고, 청각장애인의 청각이 '정상'이 되는 것만이 장애인 해방의 전부인 식이었다면 우리는 장애를 다루는 관점에서 많은 것들을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의 정의를 말할 때 신체적 및 정신적으로 정상성을 충족하지 않거나 손실, 결핍된 상태로 인해 직접 제약을 받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당사자의 공감을 배제하고 프라이드(긍지)를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는 없다.
자폐 치료에 대한 반대가 주요 쟁점이 되는데, 이 또한 단순하게 정의된다고는 볼 수 없다. 진영적인 부분을 떠나 사실적인 부분 중심으로 모두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ADHD 등과는 달리)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치료약이 없으며 신약 개발 이전에 화학적, 생물학적 원인 규명조차 힘들다는 것이 오늘날의 현대 과학이고 의학임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진영이 과학의 곁에 서 있다고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다만 자폐성 장애인들이 사회성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지원이나, 자폐인의 공존장애로 흔히 나타나는 증상 내지는 정서에 대한 관리를 '치료'와 명백히 분리해서 볼 수 있을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부분을 '신경적 다수자에 대한 부역'으로 본다면 당사자들의 공감부터 얻기 힘들다.
물론, 치료 명목의 모든 것을 옹호할 수는 없다. 이런 업계가 그렇듯이 자폐 자녀를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에게 뭐라도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을 그들의 간절한 심정을 이용해 고액의 치료를 홍보하는 경우가 있다. 이 가운데는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치료 상품 역시 존재한다. 과학을 받아들인다면 어느 쪽에 서야 할 지는 명백하다.
신경다양인 당사자의 삶이 신경다양성 너머도 바라봐야 하는 이유
신경다양성 자체는 미등록 자폐인을 비롯한 정신적 장애인의 권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전환점이 맞다. 신경다양성의 이름으로 당사자가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 다르되 동등하며 기죽지 말아야 할 하나의 인간임을 선언하게 해 줬다는 점은 긍정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경다양성이 가진 분명한 허점 또한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신경다양성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 자체가 포괄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생긴다는 현실적 한계점이 있다.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현실적인 한계점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또한 비당사자 위주로 신경다양성의 언어가 사용되면서 정신적 장애인을 타자화하여 단순한 능력주의로 치환되어 '어디에는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흡사 예전에 하던 삼국지 게임에서 '능력치 낮은 인물도 짐 나르기엔 유용하게 쓸 수 있다.'가 떠오르는 씁쓸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경계선 지능의 인구비율 14%가 다 신경다양인인지 아닌지 논쟁이 일어나는 광경도 펼쳐진다. 따지고 보면 14%나 경계선 지능이라는 말은 50%나 중간값 이하의 지능 지수를 갖고 있다는 말이나 다를 것이 없는 개념인데 말이다.
정리하면, 신경다양성과 이중공감문제의 이념적인 부분에 머무르지 말고 자폐인들이 사회 일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살아감은 물론 비장애인들처럼 차별 없이 자신의 뜻을 꿈꿀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미등록 자폐인들이 살아감의 필요에 맞는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폐인들이 공감할 수 있을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 희망 자극과 불행 신파는 정 반대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다. 타자화되지 않고 우리 자폐인들의 손으로, 긍정적으로 '우연히 자폐 당사자가 된' 이번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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