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아동·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사건이 끊임없이 이슈로 터져나오고 있는 가운데 지난 한해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전국 성폭력상담소·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이하 전성협)가 지난 17일 2010년 한해동안 전국의 경찰서, 검찰청, 법원에서 진행한 성폭력 관련 사건의 수사, 재판과정 및 결과를 모니터링해 선정한 '2010년 여성인권존중 디딤돌·걸림돌·특별상'을 발표한 것.
'2010년 여성인권존중 디딤돌·걸림돌·특별상'은 9명의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총 13개(디딤돌6·걸림돌5·특별상2)로 선정됐다.
디딤돌은 성폭력사건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피해생존자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기여한 사례며, 걸림돌은 피해생존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2차 피해를 야기한 사례를 지칭한다.
또한 특별상은 성폭력사건의 수사 및 재판 외 과정에서 피해생존자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기여한 사례다.
이 중 지적장애인을 대상으로 발생한 사례 4개(디딤돌2·걸림돌1·특별상1)를 원문 그대로 실어본다.
■디딤돌 수상자: 지적장애인의 진술의 일관성 및 신빙성 결여로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1심판결을 반박하고 지적장애인의 진술의 일관성 및 신빙성 결여의 문제를 ‘증거 없음’으로 배척하지 않아야 하며 성폭력의 수단인 ‘위력’을 가해자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지위 등을 포함하여 넓게 해석하여 가해자에게 실형을 판결한 [서울남부지법 제1형사부의 손왕석 재판장 및 김기수 판사, 강윤희 판사]
수상이유: 성폭력 사건은 그 특성상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동안 재판부는 성폭력 사건과 피해의 특성,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의 진술이 엄격한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가해자가 손쉽게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으며, 이는 성폭력 사건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한 가해자의 가해 수단인 ‘위력’ 역시 육체적인 힘만으로 좁게 해석되어 왔다.
특히, 피해자가 지적장애인인 경우 진술의 일관성 및 신빙성이 오랫동안 배척되어 왔으며, ‘위력’ 역시 육체적인 힘만으로 좁게 해석되어 왔다. 1심 재판 시에는 피해자가 직접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이나 증언이 신빙성이 없고 성관계시 강제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2심 재판부인 서울남부지원 형사 1부는 성폭력피해 지적장애인이 드러내는 진술의 일관성이나 신빙성 결여의 문제를 ‘증거능력 없음’으로 배척하지 않아야 하고, 가해 수단인 ‘위력’을 폭행·협박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지위 등을 포함하여 넓게 해석하여 지적장애인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성폭력에 대한 남성 중심적 통념과 지적장애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많은 ‘지적장애여성들의 성적자기결정권’이 외면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폭력 피해 지적장애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확보해 낸 의의가 있다.
더욱이 우리 법조계가 1심 판결의 오류를 반박하는 2심 판결이 드문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판례는 지적장애여성의 성폭력사건에서 비일비재하게 드러나는 지적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이로 인한 재판부의 판결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디딤돌 수상자: 지적장애2급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항거불능 여부를 피해자의 정신상 장애의 정도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을 비롯한 관계, 주변의 상황 내지 환경, 가해자의 행위 내용과 방법, 피해자의 인식과 반응의 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해석하여 장애인성폭력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제대로 살린 [대구지방법원 제12 형사부의 임상기 재판장, 박강민 판사, 박정원 판사]
수상이유: 그동안 장애인 성폭력사건은 ‘항거불능’ 조항에 대한 좁고 엄격한 법리해석으로 말미암아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범행당시 장애로 인하여 항거불능의 상태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명백한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여성장애인의 인권이 유린되는 빌미를 제공하여 왔다.
이번 대구지방법원 재판부는 ‘성폭력범죄처벌법이 규정하고 있는 신체 및 정신장애로 인한 항거불능상태는 장애자체로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경우 뿐 아니라 장애가 주된 원인이 돼 심리적 또는 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하다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이른 경우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는 재판부가 피해자의 직접적인 장애뿐 아니라 장애로 인한 제반환경을 고려하여 심리적 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해진 경우도 항거불능 상태로 봐야한다는 것을 포함한 것이다. 즉 기존의 항거불능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해석을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장애인 성폭력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제대로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걸림돌 수상자: 지적장애인 성폭력 사건의 핵심을 보지 않고 주변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피의자가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를 위계로 기망하여 성폭력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혐의 없음(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수원 지방검찰청 성남지청 김덕곤 검사]
수상이유: 김덕곤 검사는 피해자가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는 자로서 일반인에 비해 지능이 다소 낮은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가해자가 지적장애의 특성(자기 의사결정능력 미약, 저항 정도 미약,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판단과 대처능력 미약, 예측력 부족 등)을 이용하여 성폭력 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모친과의 약속을 무시한 것과 피해자에게 ‘아이를 가져야 결혼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계속 만날 수 있다’ 등의 위계와 위력으로 피해자를 수차례 성폭력 했다는 피해자와 그 모친의 진술을 무시하고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지적장애인 성폭력피해자에 대해 피해자의 장애정도를 비롯해 가해자와의 심리적, 사회적 관계까지 살펴 가해자의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도록 한 대법원 판례에 의해 충실한 판단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 사건은 검사의 자의적 판단,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남성/비장애인 중심적 해석으로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하였다.
■특별상 수상자: 장애인부모회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며 지적장애인의 성폭력사건을 발견해 이를 신고하고 다양한 자원을 제공한 [창녕군 장애인가족 지원센터의 김나영 사회복지사]
수상이유 : 김나영 사회복지사는 장애인가족복지관에서 있었던 성교육프로그램에서 10대 중반의 지적장애 여성이 외조부의 지인들(가해자1, 가해자2)로부터 여러 차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신고하였다.
피해자가 의료지원 및 진술지원, 해바라기 임상심리 평가, 정신감정을 지원하였고 특히 지적장애인 특성 및 장애인 당사자 관점에서 이해를 도우고 상담 진술시 동석하여 원만한 진술녹화를 도왔다. 현재 가해자1은 1심에서 4년 선고를 받았으며 가해자2는 현재 1심 4차 공판이 진행 중이다.
지적장애인 성폭력은 가족 내의 다양한 역학관계의 맥락때문에 가족 내에서 인지된다하더라도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특히 가족 내 가장의 주도 및 은폐 하에 이루어지는 지적장애인 성폭력은 더욱 비가시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장애인들이 외부인으로부터 조력을 얻을 가능성은 오랜 기간 쌓인 라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김나영 사회복지사는 피해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현재까지 프로그램을 유지해오며 관계형성을 해 놓아 피해자를 지지하고 당시의 피해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 희망 의사를 파악하고 끝까지 이를 실현시키는 데도 조력하였다. 피해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쉼터로 피해자를 인계하는 등 지역사회 안에서 성폭력 피해를 인지하였을 때 피해 아동 및 여성의 성장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는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성협, "성폭력법의 핵심은 성적자기 결정권이 보호"
전성협은 디딤돌, 걸림돌의 특징에 대해 "피해자가 지적장애인인 경우 '진술의 일관성 및 신빙성결여'를 놓고 내린 상이한 해석과 판결"이라고 전했다.
협의회는 "지적장애인과 성폭력사건의 특성,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 문제'가 재판부의 핵심의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며 "지적장애인의 경우 진술 일관성 및 신빙성 결여는 '증거없음'으로 배척하지 말아야 하며, 사건맥락과 위계에 대한 넓은 해석을 통해 지적장애인의 특수성이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성협은 "성폭력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에 기댄 판결 오류 가능성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고 전했다.
전성협은 "성폭력법의 핵심은 성적자기 결정권의 보호다. 일부 법원은 성폭행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피해자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는 등의 잘못된 편견을 가정해 판결을 내리고 있다"며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인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데 있어 어떤 기준도 어떤 원칙도 어떤 '피해자다움'도 있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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