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담 호수 위로 피어난 전설의 탑 '용호탑'

【에이블뉴스 하석미 칼럼니스트】 가오슝의 북쪽에 자리한 ‘연지담(蓮池潭)’은 원래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한때는 논밭에 물을 대는 실용적인 기능을 하던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관광지로 탈바꿈했고, 지금은 호수 둘레를 따라 다양한 전통 건축물과 조형물이 들어서며 문화와 풍경이 어우러진 대표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둘째 날, 나는 바로 이 연지담으로 향했다.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 위에 서 있는 용호탑(龍虎塔)은 멀리서도 금세 눈에 띌 만큼 화려하고도 독특한 자태를 자랑한다. 7층 높이의 쌍둥이 탑 아래에는 용과 호랑이 조형물이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서 있다. 대만 전통에 따르면, 용의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의 입으로 나오면 ‘복은 들어오고 화는 물러난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이 경로로 관람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탑은 계단으로만 연결되어 있어 휠체어를 사용하는 나는 내부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남편이 탑 안을 올라가 사진을 찍고, 눈으로 본 풍경을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탑 내부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을 묘사한 벽화들이 붉고 푸른 강렬한 색채로 채워져 있고, 중국 민족 특유의 미감이 살아 숨 쉰다고 했다. 비록 나는 외부에서만 머물렀지만, 화려한 지붕 장식과 대칭 구조, 그 위용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용호탑 바로 앞 과일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잘 익은 애플망고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현지인들이 줄을 서서 구매하고 있었다. 나도 큼직한 망고 하나를 골라 먹어보았는데, 우리 돈으로 약 2천 원밖에 하지 않았다. 칼로 잘라주자마자 한입 베어 물었고,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진짜 여름이지!" 싶은 순간이었다.

화려한 탑과 잔잔한 호수, 시원한 망고 한입까지~

전쟁의 신을 모신 춘추각과 ‘의리의 상징’ 관우

용호탑에서 약 700미터 정도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춘추각은 전쟁의 신 관우를 모신 두 개의 탑이다. 입구가 좁아 휠체어로 내부에 진입할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본 관우상은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했다. 삼국지에서 유비·장비와 끝까지 의리를 지킨 인물로 여겨지는 관우의 조형물은 중국 문화의 정신적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침 근처에 열린 현지 장터에서는 아열대 과일 백향(패션후르츠)을 1kg에 4천 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남편과 길가에 앉아 껍질을 까며 하나씩 먹다 보니, 어느새 1kg을 모두 해치울 정도로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고요한 수상신상과 화려한 건축미, 공자묘까지

산책하듯 조금씩 이동하다 보면 북극현천상제라 불리는 거대한 수상 신상이 등장한다. 이곳은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상 신상이며, 바로 옆에는 자금성의 태화전을 본뜬 화려한 건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 근처에는 대만 최대 규모의 공자묘도 함께 있어 학문과 전통 문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가오슝 시립역사박물관에서 마주한 기억과 성찰의 시간

가오슝 시립역사박물관은 녹색 지붕과 파스텔빛 외관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자연스레 휠체어의 방향을 건물 중앙 현관을 향해 틀었다. 이 박물관은 원래 1930년대에 지어진 구 시청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곳으로, 겉보기에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는 대만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담겨 있는 장소였다.

건물 외관은 동양의 전통 지붕 곡선과 서양의 아치형 창문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이곳이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마주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건물 모형으로 만들어진 전시물에서는 과거의 골목과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고, 나는 그 사이를 지나며 한 시대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실내는 복잡하지 않았고 휠체어로 이동하기에도 큰 불편이 없었다. 전시실에는 대만의 일상과 문화, 교육의 역사, 그리고 정치적 격변의 순간들이 다양한 사진과 유물로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교실을 재현한 공간에서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체험존이었다. 어릴 적 꿈을 잠시나마 되살린 듯한 느낌이었다. 벽에는 ‘이제 우리가 돌아본다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앉아 과거를 되돌아보는 대만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자 했다.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공간은 바로 228사건 전시관이었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뒤, 다시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이 공간은 조명이 살짝 어두웠고, 분위기 자체가 묵직했다.

희생자들의 사진과 당시 신문, 진술서가 벽면 가득 걸려 있었다. 한 장 한 장 들여다볼수록, 이 공간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사실’로 다가왔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겉으로는 작은 박물관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거대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휠체어로 박물관 앞 뜨거운 돌바닥을 지나며 다시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봤을 때, 이곳은 단순히 역사를 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마주하고 성찰하는 장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의 강을 따라 걷는 여유

박물관 바로 옆으로는 아이허강(Love River)이 흐른다. 가오슝 시내를 가로지르는 최대의 운하로, 연인들을 위한 산책 코스로도 유명하다. 밤에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었지만, 나는 낮에 잠시 둘러보았다. 물 위에 반사된 햇빛과 주변 풍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장미 성모 성당, 신앙과 건축이 만나는 곳

가오슝 시내의 분주한 거리 한복판, 빌딩 사이를 지나 걷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중세 유럽의 한 풍경처럼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등장한다. 바로 장미 성모 성당(Rosary Cathedral)이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이 성당은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으로, 1859년에 스페인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회색빛 석재로 지어진 건물 외관은 낡았지만 품격을 잃지 않았고, 창문을 따라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와 초록색 장식이 성당의 고요한 품위에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성당 입구에는 ‘천주 보佑’라는 글귀가 쓰인 귀여운 캐릭터 조형물이 서 있었고, 환한 웃음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거울 수도 있는 신앙의 공간에 작은 위트를 더해주는 듯한 풍경이었다.

정문 앞 작은 정원에는 마리아상이 모셔진 기도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날씨는 무척 더웠지만 울창한 나무와 석조 분수 사이에서 바람이 잠시 시원하게 지나갔다. 마치 신의 숨결처럼.

성당 내부는 마침 예배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대리석 복도 양옆으로 나란히 앉은 신자들, 돔 천장을 따라 아치형으로 이어진 목조 기둥과 그 위를 감싸는 금빛 장식, 그리고 정면의 제단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성모상. 모든 것이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빛이 천창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은은한 무지갯빛을 드리우는 그 모습은,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며 이 공간이 주는 정적과 평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기도란 반드시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장미 성모 성당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었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잠시 들른 여행자에게도 문을 열어주는 넉넉한 품 같은 곳이었다. 역사의 흔적이 스며 있는 돌벽, 사람들의 숨결이 쌓인 예배당, 그리고 뜨거운 대만의 태양 아래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믿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이곳은 시간을 담고 있는 성당 그 자체였다.

가오슝의 밤을 삼킨 시장, 리우허 야시장

가오슝의 하루가 저물고, 노을이 도시를 부드럽게 덮을 즈음. 거리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곳이 바로 리우허 야시장이다. 대만을 대표하는 야시장 중 하나인 이곳은, 해가 지면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맛의 거리’이자, 여행자와 현지인이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무대이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환하게 불이 켜진 옥수수 노점이다. 커다란 찜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노란색과 자줏빛이 섞인 다양한 옥수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지글지글 구워지며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하나 집어 들고는, 뜨거운 김을 후- 불어가며 한입 베어 물었다. 익숙하면서도 또 다르게 다가오는 그 맛은 ‘대만식 거리 음식’의 첫인사 같았다.

바로 옆 과일 가게에서는 무언가 독특하게 생긴 과일이 눈길을 끌었다. ‘석가(Custard Apple)’라는 이름표가 붙은 그 과일은 처음 봤지만, 호기심에 하나 구입해 바로 맛보았다. 큰 씨앗이 박혀 있는 과육은 달콤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맛을 뭐라 정의하긴 조금 어려웠다. 아직도 어떻게 맛을 표현해야 할지 모호한 과일이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야외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선 갓 구운 새우와 맥주를 판매하고 있었고, 한 자리에 앉아 뜨거운 새우를 까며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더운 날씨, 북적이는 사람들, 익숙하지 않은 언어 속에서 마시는 그 한잔은 어떤 고급 레스토랑의 식사보다 더 깊은 만족을 주었다. 시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이었다.

다시 걷는 길 위에는 끊임없는 유혹이 이어졌다. 노란빛을 머금은 고구마볼이 꼬치에 꽂혀 바삭하게 튀겨져 있고, 맛은 마치 우리나라 찹쌀 도넛을 연상케 했다. 바삭한 만두처럼 생긴 길거리 튀김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손에 담겼다. 게다가 신선한 사탕수수즙까지. 망설임은 사치였다. 이곳에서는 고민보다 한입이 먼저였고, 그 한입이 주는 기쁨이 시장의 매력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휠체어를 탄 내게도 비교적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간이 테이블과 낮은 카운터, 무엇보다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는 상인들의 미소가 이 시장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리우허 야시장은 단지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맛보며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를 더 알아가는 여행의 장이었다. 함께 나눠 먹는 순간이 있고, 처음 보는 음식을 두고 웃는 일이 있으며,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어느새 ‘여행자’가 아니라 ‘이곳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무리하며

이번 여정은 가오슝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휠체어로 직접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었지만, 짝궁의 도움과 따뜻한 시선 덕분에 새로운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하고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남길 수 있었다.

가오슝은 단지 ‘편한 도시’가 아니라, 천천히 둘러보고, 나만의 속도로 감각하며, 새로운 문화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도시였다.

대만 접근성 정보

연지담 용호탑: 외부 관람 가능, 내부 진입은 계단, 용호탑 바로 옆 장애인화장실 있음 이동- MRT로 이동(홍색라인의 생태유원지구역) 이동

춘추각: 입구 좁아 휠체어 접근 어려움

시립역사박물관: 휠체어 접근 가능, 장애인 화장실 있음

사랑의 강: 평지 산책 가능

장미 성모 성당: 외부 관람 가능

리우허 야시장: 휠체어 접근 가능

숙박: No.266, Cheng-Kung 1st Rd 가오슝 대만 801 그랜드 하이 - 라이 호텔 (Grand Hi-Lai Hotel) ☎ +8867216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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