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은 50대 이후부터 기억력 저하와 함께 우울감 및 불안감을 겪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병원을 방문하면, 심리 검사를 위해 설문지를 작성하게 된다.
MMPI(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 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 BDI(벡 우울척도, Beck Depression Inventory), STAI(성인 상태 불안 척도, State-Trait Anxiety Inventory) 등 다양한 평가 도구가 사용되는데, 시각장애인의 경우 설문지 문항을 대신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주로 활동지원사와 함께 병원을 방문해 설문지 읽는 것에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설문지에는 민감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장기간 함께할 활동지원사 앞에서, 숨기고 싶은 것마저 모두 답변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그 민감한 질문들에 어려움을 겪었다. 활동지원사와 함께 검사를 진행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 결국 상담소 직원이 대신 문항을 읽어주었다. 다행히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런 기관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병원에서도 관련 직원이 긴 시간 동안 몇백 문항을 읽어주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인력의 소모를 초래하기에 달갑지 않을 것이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심리 검사 중 하나인 MMPI를 예로 들어보자. 이 검사에는 범법 행위, 도덕성, 성적 지향 및 성적 행동과 관련된 질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혼자서도 답변하기가 망설여질 수 있는 항목들인데, 타인이 함께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큰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내 의료법에 따르면 정신과에서 진행되는 심리 검사 또한 환자의 의료 비밀에 속하며, 이는 환자의 동의 없이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정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의 경우, 이러한 민감한 내용을 외부에 공개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인은 혼자서 심리 검사를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안은 전혀 마련되지 않은 것일까? 미국의 MMPI 저작권을 보유한 미네소타 대학교 출판사의 웹사이트를 확인한 결과, 점자나 청음 버전에 대한 안내를 찾기 어려웠다. 장애인 복지가 잘 마련된 것으로 알려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에서도 MMPI의 점자 또는 청음 자료에 대한 정보는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설령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시각장애인이 혼자 심리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단순한 불편함으로만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부끄러움을 참고 답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타인이 함께하는 상황에서 검사의 결과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이는 결국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의 정신 건강 진단에서 질적인 차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겪는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다. 서초동에 거주하는 필자의 맹학교 후배 역시 대형 병원에서 심리 검사를 받을 당시, 오랜 시간 함께해야 하는 활동지원사와 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불편해 낯선 사람과 검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다고도 말했다.
시각장애인이 편안하게, 무엇보다 진솔하게 검사에 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보다 정확한 인지 검사와 심리 검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점자나 청음 자료에 관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 전 세계 공통의 문제라면, 당장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해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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