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승의 날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선·후배들을 만나 서로의 근황도 묻고 그간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풀려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러저러 이야기들이 오고가던 중 이미 유학을 다녀온 후배와 이제 막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이 유학 생활 중에 겪게 되는 다양한 인종차별 경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당연히 이미 유학을 다녀온 후배가 주도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뭐랄까 문득 그 후배 녀석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인종차별’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인종차별 비스무리한 것은 있을 거다. 그런 것이 아예 없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아무래도 물설고 낯선 곳에 가서 말도 어눌하고 생긴 것도 다른 마당에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나 ‘텃세’라는 것도 있지 않던가!

필자도 유학은 아니어도 나름 외국 생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대충 분위기는 감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런 필자가 확신하건대, 한국인이 외국에서 유학을 하는 것 보다 같은 한국인임에도 장애인이 한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차별의 차원과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인종차별을 걱정하던 그 후배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장애인이나 혹은 약자에 대한 차별은 전방위적이며 일반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즉 일상 자체가 차별적이며, 그 누구도 고의적이지 않더라도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얼마 전 한 방송기사에 의하면 정신지체 장애인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모 태권도장 관장과 사범이 구타와 폭력을 가해서 결국 해당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야말로 이 나라의 일상에서의 장애인 차별의 극단적인 하나의 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장애인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어디에도 장애인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없으며, 평범한 한국인들의 의식 세계 내에는 아직도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장애인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성의 문제가 아니다. 양심의 가책을 별로 받지 않으면서, 상식적으로 장애인들을 차별할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과연 장애인들은 그렇게도 이상한 이방인들인가? 혹은 괴물들인가?” 그리고 “장애인들을 자신들과는 그렇게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실제로 장애인들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인가?”

필자 역시 ‘차별의 일상화’에 힘겨워하며 살아간다. 학계에서조차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이며, 필자와 아무 상관도, 이해관계도 없는 학자들조차 대놓고 필자에게 불쾌한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한다. 오히려 그것에 반응을 할 경우, 필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어서 모욕감과 분노가 치밀어도 침묵하곤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천적인 장애인들보다 여러 가지 사고 등으로 인해서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늙고 죽지만, 가능적으로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일상적 의식에는 아직도 ‘필연’이나 ‘가능’의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오직 지금 바로 눈앞에 드러나는 ‘지금’만 있다. 그래서 마치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의 멍청한 누우들이 사자가 달려들 때만 혼비백산하다 자기 아닌 다른 녀석이 희생되면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양 태연자약해 하듯이, 오직 그때 그때 당장 벌어지는 것만 알 뿐이다.

한국인들의 이런 생각 없음과 거기서 비롯된 비윤리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갑(甲)질 문화’다. 아직도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말 대신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이 한 순간이라도 유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기가 무섭게 노골적으로 티를 낸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에 ‘절대 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누구나 어느 때는 갑이 되다가고 다른 때는 을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갑질 문화’가 팽배하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자 자기 무덤 파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의 대게의 사람들은 자신이 ‘갑’이 되는 것 보다 ‘을’이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갑질을 즐긴다.

도덕과 윤리는 사실 이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곧 자신이 부당한 대점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남에게 부당한 대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혹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부도덕한 이유는 그런 도둑질과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들도 내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모순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오직 인간인 한에서 가능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타인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타인이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인정하는 모순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한에서 가능하다. 이런 헤아림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이니 말이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더 이상 억울하고 서럽지 않게 될 때,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접받지 않게 될 때, 실제로 비장애인들의 삶도 비할 바 없이 향상될 수밖에 없게 됨은 자명하다. 언제든 ‘을’이 되도, 장애인이 되도,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 없이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오직 각자의 인생의 목적과 그에 따른 성취만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예의, 장애인에 차별이 없어지는 것, 이는 결코 단순히 ‘당위적’인 사항들이 아니다.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며, 실질적 이익과 관련되는 사항들이다. 지금 이 순간도 한편으론 생각 없이 갑질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인종차별을 걱정하는, 그러면서도 아무 의식없이 장애인을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다고 느끼곤 하는 우둔한 한국인들이 부디 빨리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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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칼럼리스트
뇌병변장애인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철학박사)했으며, 연세대, 항공대, 홍익대, 교통대, 경희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사)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다. ‘장애’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며 한국과 한국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코드들 중의 하나라고 판단하며,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장애’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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