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이 형의 페이스북 캡쳐 화면. ⓒ서인환

먼저 장애인 한음이의 죽음에 대해 상처를 갖고 있는 가족으로부터 온 카카오톡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지난 4월 6일 박한음(8세) 군이 특수학교 통학버스 안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고, 68일간 병원에서 있다가 사망하였다. 3개월 후 같은 광주광역시 지역에서 유치원생 최 모(4세) 군이 8시간 동안 통학버스 안에서 방치돼 의식불명에 빠졌다.

두 아이 모두 차량에 탑승한 통학 보조교사와 인솔교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위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두 사건은 광주지역, 그것도 통학버스 안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음이가 다니던 특수학교와 최 군이 다니던 유치원은 승용차로 12분 거리(4.3Km)에 있다.

그런데 사건처리를 놓고 관계기관(교육감)의 대처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사한 사건에 왜 이렇게 다를까?

장휘국 교육감에게 ‘광주 oo중학교 고 박한음군 친형입니다.’라며 통학버스 블랙박스 영상을 첨부한 한음이 사연을 페이스북 메시지로 보냈다.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었다. 장애학생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애도의 표현도 없었다.

그런데 최 군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은 장휘국 교육감은 달랐다. 장휘국 교육감은 8월 3일 최 군이 입원해 있는 전남대병원을 방문한 후 페이스북에 사진이 포함된 글을 포스팅했다.

그는 ‘유치원 어린이 사고 소식에 맘이 편하지 않아 휴가를 중단하고 출근했습니다. 모든 과정을 점검하고, 학부모를 위로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논의하면서 내내 안타깝고 마음 아픕니다. 아가야 제발 의식을 차리고 엄마에게 돌아와 주렴. 제발… 하나님, 꼭 이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보내 주세요.’라며 최 군에 애틋한 마음을 담았다.

이 대목에서 장휘국 교육감의 진정성이 의심된다. 정말 가슴이 아픈 게 맞을까? 최 군에게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한음이는 죽는 그날까지 ‘엄마’, ‘아빠’, ‘형’이라고 불러보지도 못했다.

그런 동생이 억울하게 죽자 중학생 형이 해당지역 교육감에게 ‘사건에 관심 가져 달라’고 하소연하였는데, 모른 체했다. 아니 묵살했다.

이것으로 인해 한음이의 형은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위로의 말 한 마디가 그리 어려웠던 것일까? 장휘국 교육감에게 한음이의 억울한 죽음과 가족들의 아픔은 아픔도 아니었던 것인가?

왜 한음이가 장애인이라서? 한음이와 최 군이 다른 것이 있다면, 한음이는 8세 중증 장애인이었고, 최 군은 중국 국적을 가진 4세 조선족 아이였다는 것뿐이다."

위의 글을 읽고서 가족이 또 상처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음이에 대한 치유를 받고 싶고 누군가의 위로가 힘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도 담겨져 있다. 그래서 억울한 한이 서려 있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었고, 당국의 관심을 원했던 중학생 형이 교육감에게 형으로서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던 교육감이 유치원생의 통학버스 유기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자 대책회의를 하고 찾아와 위로를 하고, 기도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위로를 받고자 했던 형은 상처를 받게 되었고 더욱 억울한 생각이 들어 위와 같은 글을 포스팅한 것이다.

왜 교육감은 한음이에 대해서는 무반응을 보이고, 최군의 사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위로를 했을까?

첫째, 한음이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고, 최군의 사건은 현재형이라서라고 가정해 보자. 과거형이라고 하더라도 사망을 기준으로 과거형인 것이지 가족의 한이나 사고처리는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과거형이라고 하여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아니다.

둘째, 한 사건은 덮고 싶은 사건이고, 한 사건은 드러내고 싶은 사건이라고 가정해 보자. 한음이의 사건은 장애가 주원인이라고 몰아서 덮을 수 있고, 최 군의 사건은 방치가 명확하므로 드러내어 꼬리자르기를 하는 것이 해결책이어서 서로 다르게 대했다고 볼 수 있다.

왜 장애인 관련 사건이 발생하면 장애가 주원인으로 되어 다른 조건들은 오히려 묻혀야 하는가가 화가 나는 일이다. 최 군은 어른들의 잘못이 분명하나 한음이의 사건은 장애로 인한 것이라고 하면 이는 처리과정에서 장애는 면피의 핑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가 주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건인데, 교육감이 대꾸를 하면 사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고, 대꾸한 글을 퍼 날라 이용할 수 있어 답을 하지 않은 것이라면 최소한 장애인 동생을 잃은 어린 중학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까지 아껴야 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이유가 아닌 것이다.

셋째, 한음이 사건은 중학생이 한 요구였고, 최군의 사건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룬 사건이기 때문이라 가정해 보자.

교육감이라는 최고의 책임자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거나, 언론을 통해 교육감으로서의 입장을 밝힘으로써 인품과 대처능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의도였다면, 한음이 사건은 언론이 거의 다루지 않았고 오히려 교육감이 나서서 문제를 키울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면 교육감은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언론 홍보를 한 것이 된다.

어린 학생의 하소연이나 상처 받기를 원했던 손을 뿌리친 것은 무의도적 결과일 수는 있으나 정말 세심한 교육자로서는 좀 따뜻한 가슴이 냉철한 머리보다 우선해야 치유가 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넷째, 한음이 가족의 주장처럼 장애인라서 무시해서 다르게 대했을까? 비장애인의 사건은 위문도 하고, 공개적으로 글도 남기고 간절한 기도까지 하면서 장애인의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당국의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기피나 차별로 보여진다.

한음이 사건은 자연인이 아닌 망자에 대한 것이고, 교육적 편의, 즉 정당한 편의제공과는 다른 사건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 것이므로 법적 차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 비교되는 사건을 놓고 보면 차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를 입은 가족들은 그래도 사회적 가치나 인간적 위로에 의존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으면 슬픔을 극복하기 어렵고, 사회에 대해 한으로 간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픔이 있는 사람은 아픔을 호소하고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정치가나 행정가, 이웃들의 치유능력을 외면함으로써 더욱 상처가 깊게 만드는 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방치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현재 환자를 대하고 있는 의사가 치유하는 것이지, 멀리 있는 명의가 치유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치유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장애를 가진 가족이라면 이미 소용없고 시간만 낭비한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외면하거나 치유해 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을 하거나 그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더 깊이 빠져들기보다는 스스로 침잠하여 바닥을 차고 나오는 순수절망을 통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살이에서 가치관을 살만한 세상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절대 멘붕이 올 수 없는 한음이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독한 각오로 살아주기를 바란다.

한음이 형 한결군, 사랑하는 동생의 상실에 대해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잠시 머물렀던 동생은 누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친히 챙겨 사랑해 주실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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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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