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한 아들과 함께. ©최충일
11년 전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한 아들과 함께. ©최충일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매번 거창한 주제로 장애인의 인권을 말할 때도 있고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으로 돌려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백화점이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아빠 저거 뭐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결혼 전에는 '애들은 휠체어가 신기해서 그런 거니까'라는 생각만 하고 침묵하거나 못 들은 척 내가 먼저 지나갔던 것들이 습관이 됐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고 남들은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나만 참으면 되는 문제처럼 여겼다.

그러다 2012년 결혼하고 아들이 생기면서 그런 문제들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게 되었다. 아들에게 당연히 든든한 아빠로 보이고 싶은. 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아빠로서의 책임감인줄 알았다.

혼자 다닐 때 누군가 ‘아빠 저게 뭐야’라고 할 때와 다르게 결혼 후 아들과 다닐 때 ‘아빠 저게 뭐야’라고 하는 어린애들을 보면, 그리고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화가 났다. 나쁘게 말하면 확 분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고. 여하튼 그러한 분노들이 생기는 까닭은 아들에게 멋진 아빠로 보이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아 생기는 분노인 것 같다.

때때로 내가 누군가의 발을 휠체어로 밟아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고 할 때도 있지만 그러한 일상들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쌓이다 보니 더 위축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에 가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던 때도 있었다.

그런 두근거림은 숨기고 싶어도 표정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약점처럼 모든 행동의 걸림돌이 되었다. 남들은 휠체어로 다닐 수 있는 사회, 장애인의 이동권을 말하지만 솔직히 턱 때문에 겪은 손해나 차별 보다 턱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나의 행동을 더 작게 만드는 것 같다.

장애인 인권은 솔직히 내 개인의 문제로만 여겼지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차별이 가족의 불행으로 연결되는 상황들 때문에 예전처럼 '불편해도 참으면 되지'와 같은 반응으로는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들을 알려주고 싶어 글을 더 많이 쓰고 싶어졌다. 어찌 보면 장애가 있는 부모라서 비장애 부모들을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서 더 지레 겁먹고 피하고 싶은 나약함들이 쌓였나 싶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뻔해 보였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은 그대 론데 아들은 달라짐을 보게 된다. 12살이 된 아들은 때때로 나보다 어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지레 겁먹고 피하는 그 마음들을 옆에서 지켜본 친구처럼 묵묵히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침에 씻고 학교 가고 친구들과 만나 학원에 가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샤워하고 일상을 들려주는 아들의 세상은 내가 경험한 어린 시절과 다르다는 것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보는 세상이 아들과 같지 않을 텐데 '왜 몰랐을까'라는 미안함. 어쩌면 내가 겁먹고 피했던 일상이라고 해서 아들까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이었을까. 아들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점점 커지고 있다.

주말에 멀리 못가도 함께하는 외식, 산책로에서 자전거 속도를 내 휠체어 속도에 맞추며 나랑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뭔가를 더 해줘야 하는데 장애가 있어 못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분명 아들도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얼마큼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경험한 것들 만큼 아들도 그 눈높이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위로받고 싶은 것은 내가 아니라 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내 마음도 단단해지는 것 같다.

부모가 자녀를 위로해 줘야 하는데 위로받고 싶은 것들만 쌓여 불만 투성인 나의 마음을 질서 있게 해주는 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억지로 강한 척하고 싶지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아들이 20대가 되면 그동안 나처럼 쌓여있던 감정들이 분노처럼. 아니 사춘기에 접어들면 ‘나도 힘들어’라며 부모에게 소리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그냥 현재의 나와 아들에게 강한 척 하지도 힘들어하지도 말자.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나'라는 감정들로 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싶지 않아 졌다. 아들이 나를 위로하듯 나도 아들을 위로해야 할 순간들을 곧 마주할 날이 올 테니까.

※이 글은 에이블뉴스 독자 최충일님께서 보내 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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