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회장 임성현)는 장애인의 개별욕구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삶이 묻어나도록 지원하는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에 이어 두 번째로 ‘2016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공모를 진행했다.

이번 공모에는 협회소속 시설의 이용장애인과 직원이 총 86편의 우수사례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시설거주 장애인의 삶의 이야기가 담겼다.

협회는 외부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으로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장려상 2편, 우수작 2편 등 총 7편을 선정했다. 에이블뉴스는 수상작을 연재한다. 다섯 번째는 특별상 수상작 “최고의 행복” 이다.

흰마실 직원 박기영

“아저씨~, 아저씨의 꿈은 뭐에요? 아니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우리가 흔히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시절 여러 질문지, 질문을 받아본 내용입니다. 이제 환갑을 넘은 아저씨를 상대로 묻는 질문이라기에는 다소 의아합니다. 그래도 이 질문을 받은 아저씨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우리 각시랑 나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저희 흰마실에는 2013년 행정상 전원조치 되어 이사를 오신 한 쌍의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전에 계시던 시설에서 2008년에 결혼을 한 후 늘 시설이라는 이름하에 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흰마실에 오신 후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각자의 방을 쓰며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진정 원하는 ‘함께 사는’여건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합니다.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남편인 종환 아저씨는 과거 많은 농사일을 접하였고 흰마실에 오신 후에도 지역사회 농사일을 도와주고 또 작업장에서 도난방지텍을 끼우는 일, 여러 옷가지를 접어 포장하는 일, 지역 도서관 일손 돕기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아내인 영자 씨는 부지런한 성격으로 다른 입주자를 도와주기도 하며 빨래, 청소를 스스로 하는 흰마실의 살림꾼입니다. 현재 작업장에 다니며 직업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종환 아저씨는 최근 신장기능이 좋지 않아 일을 다니지 못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으며 앞으로는 투석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 아저씨의 환갑잔치에서 영자 씨는 “남편이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2016년 7월, 아저씨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병원에서도 이제 투석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저씨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투석’이라는 단어를 정말 이해 한 것인지, 분위기가 그랬던 것인지, “아! 투석하면 힘든데 골치 아프네.”라며 헛웃음을 보입니다.

위 사항을 흰마실에 돌아와 이야기하고 투석하기 전 두 분을 위해 평생의 꿈이던 부부생활을 잠깐인 한 달이라도 할 수 있게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종환 아저씨와 영자 씨께 노력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서였을까요? 이미 두 분은 나가서 사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다른 입주자분들이 “언제 나가요?” 하고 물어보면 항상 “곧 나가.” 혹은 “이제 가야지.”하고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는 만큼 부담감, 열정, 기대감도 커져만 갑니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가는 것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욕구, 종환 아저씨의 건강,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줄 봉사자, 자취를 할 장소, 지역사회와의 접근성, 자취에 대한 무경험 등을 고려하다보니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직접 부딪혀보기로 했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일일이 군청, 읍사무소, 문화의집, 지역주민, 좋은 마을 만들기 지원센터, 부동산을 다녀보며 자취 할 장소를 물색하였으며 자취에 도움을 줄 봉사자를 위해 대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와서는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거 및 추가 할 사항에 대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지역 주민이 소개해준 방을 보기도 하고 부동산에서 원룸을 보기도 하였는데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을 살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고려사항을 생각하며 내부적으로 회의를 해보았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첫 자취라 걱정이 많은지 시설에 최대한 가깝게 방을 구해 자주 들여다보자는 말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러면 여기에서 사는 것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원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한 달이 두 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한 달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목표이고 이 좋은 기억은 죽을 때까지 간다.”

딸랑 방밖에 없어 직접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시골 방보다는 편의시설이 대부분 갖추어진 원룸으로 방향을 잡고 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도시 시내였으면 금방 구할 것도 시골 특성상 수가 없어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다시 부동산을 통하여 원룸을 알아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다니며 연락을 드리기도 하였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받아주지 않고 혹 그렇다면 60만원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곳도 있었고 장애인은 받지 않는 다는 곳도 있어 설명을 드려보았지만 거절을 당해 씁쓸함이 남는 곳도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도 않은 원룸을 보다가 비용이 부담이 되더라도 한 번 방이라도 보자는 식으로 60만원을 부른 원룸을 찾아갔습니다. 원룸의 방, 화장실 등을 본 두 분의 얼굴은 ‘여기 살고 싶다.’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회의를 한 후 장소는 그곳으로 정하고 비용적인 부분은 나누어서 월세의 경우는 직원을 대상으로 후원 사업을, 식비는 생계비로, 공과금은 두 분의 개인 돈으로 부담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입주를 확정하기로 하고 연락을 드려 계약을 하였습니다.

입주비 마련을 위해 직원들 앞에서 모금공연을 하고 특별 제작한 관련 동영상을 시청케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선뜻 도와주신 덕분에 월세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일 뒤 계약을 위해 부동산을 방문하였는데 아저씨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고 긴장이 많이 되어 보입니다. 말수가 줄어들고 찻잔을 쥔 손은 떨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설명을 듣고 사인을 하고 나오자 아저씨의 표정이 풀립니다.

“선생님, 나도 이제 집이 생긴 거지?”

입주 전 주말에 먼저 청소를 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걸레, 빗자루 등을 챙겨 원룸에 갔을 때는 상당히 깔끔한 상태여서 크게 손댈 것이 없었습니다. 돌아와서 그 기쁨으로 인해 아저씨와 영자 씨는 이미 짐을 다 꾸렸는데 아주 완전 이사를 가실 생각이었는지 모든 것을 보따리에 쌌습니다.

다시 짐을 보며 불필요한 겨울옷 들을 빼며 설명을 드렸습니다. 또 필요한 물건들도 다 적어보며 챙긴다고 챙겼는데 막상 짐을 옮기고 나니 생각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시 가져오는 것으로 했습니다. ‘참 이사 가기 좋은 날씨입니다.’

사실 하루 세끼 밥 해먹고 사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지만 두 분은 당당하게 걱정마시라고 합니다. 영자 씨는 요리 잘 한다고 이야기하고 종환 아저씨는 청소를 잘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요, 미리 걱정할 건 없겠죠.’

“아저씨, 이사 왔는데 집들이 정돈 해야죠?”

“당연히 해야죠.”

그 날은 초대장은 어떤 형식으로 만들지, 집들이 대접 음식은 무엇을 할지 토의를 하였습니다. 초대장은 사진과 약도, 문구를 적어 컬러용지로 뽑아 고이 접어 직접 드리고 싶은 분들께 드리는 것으로 하였고 대접 음식은 간단하게 삶은 감자와 수박으로 했습니다.

초대장을 같이 만들고 직접 장을 보러 갔습니다. 맛있다는 감자로 고르고 더 맛있는 수박을 고른다며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수박만 주먹으로 통통 때려 봅니다.

집들이 날, 많이 분주합니다. 감자는 잘 삶아 졌는지 확인한다며 젓가락 구멍이 수십 개 난 감자들, 수박이 맛있는지 본다며 1/4는 없어진 수박덩어리. 하지만 두 분이서 준비하여 화기애애함만은 달았습니다. 한명, 한명씩 손님이 오시고 준비한 음식들을 꺼내어 놓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취 생활 행복하세요?”

“네!, 행복해요.”

시설 근처에서 살았을 때와는 그 수백 번은 다녔을 산책길도, 심심하면 들렸던 마트도, 이웃주민도, 모든 것이 다릅니다. 낯선 환경에서 종환 아저씨가 이야기를 하십니다.

“선생님, 떡 하나 해 와서 돌리게요.”

바로 방앗간에서 떡을 해서 주변 원룸세대, 바로 앞 주택들에 돌리기로 하였습니다. 대부분 안 계시는 경우가 많아 남는 떡이 더 많았지만 이곳의 주민으로 당당하게 누리기로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카페에 가서 빙수와 커피를 마시기도 하였고 큰 나무아래 의자에 앉아 실없이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업무를 보다가 아저씨가 잘 계시나 하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잘 있다며 힘차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순간 전화 너머로 영자 씨의 ‘빨리 말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종환 아저씨는 ‘알았다’며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놀러가고 싶어요.”

부부생활의 꽃은 역시 부부여행인데 두 분이 뭘 좀 아십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공주도 가고 싶고요, 바다도 가고 싶어요.”

그럼 만나서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상세히 계획을 세운 후 일정을 확정하였습니다.

여행 날, 공주에서 종환 아저씨의 부모님 묘를 방문하였습니다. 아저씨는 자주오지 못해 죄송하다고 합니다. 인사를 드린 후 대천으로 넘어갔습니다. 성수기여서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개의치 않고 우리만의 물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놀이를 하고 허기진 배를 달래려 근사한 저녁도 먹고 두 분만의 시간을 보내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멀리 빠져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여행이었겠지요?

여행이 끝나고 계약만료 일주일을 남겨 놓고 종환 아저씨의 건강이 더 나빠졌습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가자 투석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2016년 8월, 투석을 위한 수술을 하고 지금은 매주 3번 투석을 받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도 많은 제한이 따르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아저씨와 영자 씨는 많이 안타까워합니다.

진작 하지 못해 8년 만에 한 두 분만의 부부생활, 웃음꽃이 피는 하루하루였지만 마무리가 좋지 못해 홀로 자책도 해보며 하지 못한 질문을 이제야 해봅니다.

“그 한 달, 최고로 행복하셨나요?”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