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회장 임성현)는 장애인의 개별욕구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삶이 묻어나도록 지원하는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5년에 이어 두 번째로 ‘2016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공모를 진행했다.

이번 공모에는 협회소속 시설의 이용장애인과 직원이 총 86편의 우수사례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시설거주 장애인의 삶의 이야기가 담겼다.

협회는 외부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으로 최우수상 1편, 우수상 2편, 장려상 2편, 우수작 2편 등 총 7편을 선정했다. 에이블뉴스는 수상작을 연재한다. 세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 “되찾은 나의 행복” 이다.

청목아카데미 이용인 김용남

아침부터 온 세상이 어둠에 쌓인 듯 우울하게 흐린 날이었다. 거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던 그날 집을 나서기 전의 평범하고 행복한 아침인사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몇 번이고 곱씹어 되새긴 행복했던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였기 때문이다.

1997년 5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어...어어 ~~” 외마디 비명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나 의식을 찾은 것은 한 달하고도 보름이나 지난 6월 29일 새벽이었다.

처가의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눈물로 혼인서약을 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큰 딸 현아,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 형균이와의 아침 이별 후 저녁 재회는 늘 그렇듯 욕심 부리지 않는 우리가족의 일상적인 행복이었다. 생각하기도 힘든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같은 동네에 사는 K에너지의 직장동료 3명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여느 때와 같이 귀가하기 위해 조수석에 탑승했다. 음악을 들으며 한참 재롱부리는 것이 귀여웠던 작은아이를 생각하다가 안전벨트를 하는 것도 잊은 채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던 것이었을까? 갑자기 운전하던 동료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나는 앞 유리창에 부딪쳐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바로 나에게로 돌진하는 승용차를 발견하였지만 그 찰나가 아주 짧아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병상에서 눈을 떴을 때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몸 상태는 어떠한지, 같은 차에 탔던 동료들은 괜찮은지,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했을지 같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에 대한 염려는커녕 나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뿌연 안개 속에 꿈을 꾸는 듯 이해할 수 없는 몽롱한 상태였다.

머리 충격으로 인한 뇌손상 때문이었다. ‘뇌 좌상, 제 12흉추 압박골절 및 척수손상’ 듣기에도 생소한 이런 진단명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신체 부분이 망가졌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사고 후 시간이 지나면서 지능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감당해야 할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컸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과 아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과 폭력을 일삼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정상적이지 않은 뇌가 인내하지 못하고 밖으로 그대로 표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전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를 지극정성으로 병간호하던 아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나 아닌 다른 남자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인 마냥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퇴원 후에도 나의 이상 행동은 계속 되었고, 나는 구겨진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생각도 점점 더 일그러지고 비뚤어져 갔다. 세상이 날 비웃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러는 와중에 가끔씩 찾아와 주던 친구와도 걱정스레 전화를 주던 직장동료들과도 멀어져 갔고,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아내는 지칠 대로 지쳤고, 아이들은 집에 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집 주위를 배회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저며오는 후회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장모님이 내게 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장애인시설로 들어가 생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경제적인 문제와 아이들 걱정으로 말씀하신 지극히 현실적이고 마땅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를 내며 그 따위 소리를 할 거라면 우리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내 혈기는 두려움에서 시작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사랑을 잃을까봐,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지 못할까봐,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가장 소중한 내 가족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그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더 집착하고 소유하려하고 위엄 있어 보이려 하며 나 자신을 보호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로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척수손상을 입어 혼자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내에게 연락을 하였다. 시설에 입소하겠노라고….

교통사고 후 약2년이 지난 1999년 3월 1일 나는 그렇게 쫓겨나듯 현재의 청목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가족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은 나를 더 분노하게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했으며, 내안에 나를 가두어 철저히 다른 사람을 밀어내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끝이 없는 우울감에 빠져들었으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살아 있으니 살고 있는 것이고 죽을 수 없으니 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 없는 하루하루 속에 부딪치는 사람들 또한 내게 달가웠을 리가 없다.

시설에 입소한 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써야 하는 것도 싫었고 식단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거실만 나가면 바보같이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에, 아무나 보고 배시시 웃는 사람, 배를 깔고 밀며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자체가 싫었다. 모두 다 싫었다.

내가 왜 저 사람들과 같이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한 내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으며 하루 종일 짜증스럽게 불만을 이야기 하고 다른 이용인에게 기분 나쁜 잔소리를 하며 보내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도 잦았고, 상대방이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 화를 냈다. 다툼이 반복되면서 직원들은 나를 어려워하고 이용인들은 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예전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나의 폭언과 폭력을 보고 만류하면 더 화가 나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욕설을 내뱉은 후 분을 삭이기 위해 방에 혼자 들어가 한참을 누워있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지 않으면 분노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벽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내 몸과 물건에 남들의 손이 닿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어 힘들었지만, 내 몸은 스스로 간수한다는 생각에 봉사자나 직원들의 목욕보조를 받지 않았으며, 내 소지품 근처에는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의류도 직접 세탁해서 갈아입었을 정도로 그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분노로 가득 찬 어느 날 저녁, 원장님께서 분을 삭이기 위해 방에 누워있는 나를 찾아 들어오셨다.

원장님은 다툼의 경위를 물어보셨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원장님이 조용히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김용남님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렴풋 짐작만 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설픈 짐작으로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위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나의 위로가 김용남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저분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용인들을 편견 없이 한번만 봐 주세요. 저 분들을 보면서 김용남님이 어떠한 이유로 저분들 보다 더 불행해야 하는지 이야기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 그들은 나보다 더 심각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이유도 고민 할 수 없는, 행복감도 느낄 수 없는 낮은 인지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내가 그들보다 불행해야 할 이유를….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계속해서 흘렀다. 나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눈물이었다. 원장님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시고 나는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때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자장가였다. 신○○이용인이 박○○이용인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다.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단단하게 굳어진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친 엄마도 아니면서 아이를 낳아 본적도 없으면서 심한 간질로 몸이 굳어 활동이 어려운 어린 ○○이를 마치 친딸처럼 보살피고 사랑해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랑을 받는 ○○이보다 온갖 정성과 희생을 쏟아내는 신○○이용인이 더 행복해 보였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 지금까지 무시하며 지나쳤던 많은 영상들이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뇌병변으로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신체 부분이 하나도 없는 안○○이용인이 직원이 떨어뜨린 물건을 힘겹게 주워주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덩치만 산만했지 아이 같은 임○○ 이용인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쳐 주던 조○○이용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식사 때만 되면 거동이 어려운 신○○이용인에게 식판이며 앞치기며 챙겨주기 바쁜 김○○이용인의 분주한 모습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느낌의 영상으로 지나쳐 갔다. 그들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거룩하게까지 느껴졌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뜨거운 눈물이 얼굴곡선을 따라 베개로 흘러 내렸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오열하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때까지도 신○○이용인의 자장가는 계속되고 있었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 자장가에 나는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행복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 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두 팔과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또 경험으로 얻은 경륜이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우리 시설에서 흔치 않다.

결과적으로 나는 마음만 먹으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의 자질을 갖춘 사람인 것이다. 처음에는 가까이에 있는 이용인에게 아주 간단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변화해야 했고 그 변화가 나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다 줄 것임을 알았다.

쑥스러운 듯 퉁명스러운 듯 시작된 나의 타인 돕기는 의외로 순탄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의 이미지 때문에 도움을 왜곡시켜 생각하거나 가까이에 가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주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도 그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의 크기는 예상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다.

스스로도 그 고마움의 크기에 놀라 오히려 뒷걸음질 쳐질 정도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절대 불가능 한 일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그것이 사소한 도움이라 할지라도 받았을 때의 고마움의 크기는 그 절실함에 비례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도 장애인이면서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참 신기하게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돕기의 시작은 예상보다 나에게 큰 기쁨과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점점 더 당당하게, 그리고 더욱 세심한 배려로 몸과 마음이 불편한 청목아카데미 친구, 형제들을 도왔고 나의 작은 변화는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시설 전체 분위기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뿌듯함과 행복감을 느낀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본인이 가능한 선에서 다른 친구들을 도울 것을 선동하였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장애를 어느 한 부분의 불편함으로 바꾸어 가는 청목아카데미 가족들의 변화를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 교사로부터 조심스레 프로그램 참여 권유를 받았다.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위해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프로그램 중에는 외부 강사도 많고 밖으로 나가 활동해야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기 때문에 청목아카데미 가족이 아닌 사람과 접촉하면서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후였기 때문에 그리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또다시 꿈을 위한, 꿈을 꾸기 위한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다양한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내가 진정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래 부르기, 음악 감상, 민화그리기, 만들기, 요가, 생활체육, 스피드스텍스, 난타 등등

참여했던 프로그램 중 가장 즐거웠던 프로그램은 생활체육이었다. 강사님이 하체는 불편하지만 상체는 온전한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며 대회를 준비해 보자고 하셨다. 그 제안에 가능성이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운동을 하고 있는 같은 연배의 현역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승부욕과 성취욕이 일기 시작하였다. 시상대에 오른 내 모습도 상상하게 되었다. 들뜬 마음에 의욕이 앞서 가끔 무리를 할 때도 있었지만, 트레이너의 조언대로 지금은 무리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발전해 나아가고 있다.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대회 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적이 언제였던가! 삶의 의욕을 잃고 그냥 시간 흐르는 대로 살아왔던 날들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게 변해 있으며, 이 변화를 나는 기적이라 생각했다.

오늘도 하루를 마감하며 새로운 내일을 기대한다. 예전과는 다른 하루하루의 기적에 감사하면서….

청목아카데미에서 보낸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혼도 했고 아이들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어진 상태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그 비극 속에 나를 다시 밀어 넣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지금의 삶에 충실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절망의 나락 속에서 나를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준 청목아카데미에 감사를 표하면서, 또 어려운 벽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나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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