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발소에는 여자 애들도 와서 단발을 했고, 얼굴 탈모를 제거하러 오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여자들에게는 요금을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사탕이나 비스킷 등 먹을 것을 가져 왔다.

아내하고는 어떻게 만났을까. 이발을 하면서 동항성당을 다녔는데 성당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활동을 했다. 아내 정**(1958년) 씨도 노동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서로에게 끌리게 되었단다.

어느 생일날 가족들과. ⓒ이복남

“엄청 고민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하면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당시만 해도 물이 귀했다. 멀리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물 담당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양동이로 물을 이다 날라야 했는데 이상하게 가뭄이 들었고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면 두어 달 전부터 어머니는 새벽부터 공동수도가에 줄을 서야 했고 이발소 물대기에 바빴다. 그는 아내에게 그런 물 고생은 시키고 싶지 않았다.

26살에 결혼했는데 결혼 날을 받아 놓고 이발소는 세를 놓았고 다른 직업을 물색하다가 운전이 나을 것 같아서 1종 운전면허를 땄다. 결혼을 하고 아내는 부모님 모시고 살림을 했고 그는 운전을 했다. 처음에는 택시를 했는데 대형면허를 따서 버스도 해보고, 수산물을 운반하는 화물차도 운전했다.

그러다가 A회사에 취직을 해서 12톤 탱크로리를 운전했다. 1986년 9월 16일 오후 5시경에 퇴근을 했다. 그동안 택시로 출퇴근을 하다가 차비를 아끼려고 중고 오토바이를 하나 쌌다. 그날도 오토바이로 퇴근을 하는데 트레일러 한 대가 비스듬히 정차해 있어서 트레일러 뒤를 돌아 앞으로 나아가는데 꽝! 정신을 잃었다. 알고 보니 트레일러 앞에 포니 승용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이 받은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차는 우암동 방향이라 쓰러진 저를 차에 태우고 근처 의원에 갔으나 안 되겠다 해서 또 다시 다른 의원에 갔는데 또 안 된다 해서 7시 경에야 B병원에 갔답니다.”

둘째 아들하고. ⓒ이복남

처음부터 B병원에 갔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회오리처럼 화면이 돌아가고 희미하게 뭐라고 떠드는 소리와 자꾸만 허리춤을 잡아끄는 느낌 속에서 그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단다.

“추락하거나 교통사고 환자는 잡아끌어서 척추를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답니다.”

그런데 B병원에도 의사가 없었다. 가족들이 와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디서 의사를 찾아 왔는데 의사가 술이 취해서 수술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C병원으로 옮겼다. 척추 뼈가 부러진 곳을 골반 뼈로 이식을 하는 등 밤새도록 수술을 했다.

“아침 10경에 눈을 떴는데 수술을 하고 나니까 살 것 같았습니다.”

수술하기 전에는 정신이 깜빡 깜빡했고 정신이 들 때마다 그 고통은 말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신이 들자 ‘나중에 타고 다녀야 하니까 오토바이 수리 잘 해서 집에 갖다 놔라’고 하는 말에 가족들은 어이없어 했지만 그는 자신이 다쳤다는 것에 실감이 안 났단다. 그는 정말 몇 달만 치료하면 나가서 다시 오토바이를 탈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는 동안 그는 침대에서 꼼짝 할 수가 없었고, 아내가 대소변을 받아 내고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기고……. 그제야 자신이 꼼짝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나. 그저 눈앞이 깜깜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예전에 노동청년회(JOC) 활동하면서 봉사활동도 나가고 이발봉사도 하고 했는데 그 때 같이 활동했던 회원들이 문병을 와서는 가톨릭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5개월 만에 메리놀병원으로 옮겼다. 그동안 생계는 어찌 했을까.

“A회사에서 고맙게도 1년간은 월급을 주시데요.”

A회사에서 산재로 해 주겠다고 했는데, 포니승용차가 종합보험은 들었기에 산재를 안 하고 교통사고로 처리를 했다.

“노동청년회에서 노동법을 공부 했으면서도 왜 산재로 안 했는지, 그 후에 엄청 후회하고 고생했습니다.”

산재로 했으면 연금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처리하는 바람에 보상이 늦어졌고 대법원까지 가서야 1억 2천만 원을 받았다. 그동안 아내가 아이 셋을 업고 걸리며 병간호하랴 법원 쫓아다니랴 고생 많이 했단다.

손자들과 함께. ⓒ이복남

3년 만에 퇴원을 하고 우암동 판자 집으로 돌아왔다.

“방은 3개였지만 집이 하꼬방이라 휠체어를 탈 상황도 아니고 겨우 등을 벽에 대고 앉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를 친 포니 운전사가 생각났다. 그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날마다 전화를 해서 욕을 퍼 부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휠체어를 가져 오라해서 무작정 타고 나갔다.

그 때만 해도 수동휠체어인데 조금만 경사가 져도 올라가지지 않았지만 분을 못 이겨 식식거리면서도 동천이고 장고개를 돌아 다녔다. 그런데 휠체어는 올라갈 때는 억지로라도 밀고 올라가는데 내려 올 때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서 정말 힘이 들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 주곤 했으니 아버지가 울면서 말없이 따라왔던 것이다.

포니 운전자 집에 몇날며칠이고 욕을 해대니 얼마 후에 두 사람이 찾아 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기에 차를 한 대 사달라고 했다.

“저는 두말 안하는 사람이라 200만원인가 받고 각서를 쓰고 다시는 전화를 안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교통사고 운전자 집에 더 이상 전화는 안했지만 그 사람에 대한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맞은 편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당신이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왜 나를 이 꼴로 만들었냐.’ 시도 때도 없이 개새끼 소새끼 밤새도록 고함을 치고 울었다. 그런 날이 몇날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분노와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나 괴로워서 죽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장애를 인정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성령기도회나 철야기도회 등을 무수히 찾아다니면서 그의 가슴에서 분노가 사라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10년 쯤 되던 어느 날 기도회에서 치유의 시간이 왔다. ‘하느님 용서하게 하소서’에 응답이 왔던 것이다. 그날 이후 미움도 분노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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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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