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공장이 잘 안되어 다른 공장으로 바꾸기도 했으나 자식들 공부는 시켰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가 가장 좋아 한 일은 혼자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간,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아들이 걱정이 되는 지 아버지는 한의사가 되라고 했지만 그는 독서에만 열중했다. 그는 시인을 꿈꾸었던 것이다.

강병령 원장의 치료 모습. ⓒ이복남

“사춘기 때는 누구나 방황을 하겠지만, 장애인 입장에서는 그 방황이 좀 더 크고 길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공부할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쳐서 공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직업도 없어서 빈곤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내성적이라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동래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생이 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속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마침 누나가 다녔던 흥사단 아카데미를 찾아가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 용맹정진 등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내성적인 성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치외교를 가르치는 배정현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배 선생은 수업을 할 때마다 장애가 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려는 강병령이를 본받으라고 하셨기에 매일 칭찬해 주시는 선생님의 은혜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저절로 타의 모범이 된 것 같았다.

“그 때만 해도 친구가 서너 명 밖에 없었는데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잘 웃고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다보니 거의 뻔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세계요트연맹회장과 담소. ⓒ이복남

동래고등학교 다닐 때는 집이 사직동에 있었기에 아침마다 택시비를 받았다. 그런데 성격이 바뀌면서 택시비는 친구들에게 다 썼고 힘들게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예전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다녔는데 성격이 바뀌자 친구들이 서로 제 가방을 들어 준다고 경쟁하기도 했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의대를 가기로 하고 이과를 택했다. 당시만 해도 의대나 약대 심지어는 법대까지 중증장애인은 받아주지 않았다. 한의과는 경희대 원광대 동국대 대구대 대전대 등이 있었는데 경희대와 원광대에서는 중증장애인은 안 된다고 했고 동국대는 괜찮은 것 같았다.

1981년 본 고사 없이 학력고사 성적으로 원서를 제출했는데, 아버지가 경주 동국대에 원서를 내러갔더니 목발로 걷는 사람이 있어서 따로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원서를 내고 왔단다. 1차는 합격이라 2차로 면접을 보러 갔다.

“학장이 학력고사 점수가 몇 점이냐고 물었는데 380점이라고 얘기 한 것 같습니다.”

학력고사는 만점이 340점인데 학장 앞에서 면접을 보면서 너무 떨려서 말이 헛나온 모양이다. 학장은 나머지 점수는 어디서 땄나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합격증을 받고나니 동국대에서 아버지에게 학교로 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낌새가 이상하다며 등록금 낸 영수증을 가지고 학교로 갔답니다.”

큰 딸의 의대 대학원 입학. ⓒ이복남

동국대 한의과는 1979년이 1기인데, 2기까지는 처음이라 장애인도 입학시켰다. 그런데 1981년 3기부터 중증장애인은 안 받기로 했는데 면접에서 학장은 그를 보고 웃느라 실수로 F를 빠뜨려 합격증이 나가게 된 것이란다. 합격이 통보되고 난 뒤에야 학교 측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서 전과를 하라고 했다.

성적이 안 되어서 잘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기회도 안 주고 전과를 하라니 말이 되느냐.

“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서 학장님의 책장을 뒤집어엎었답니다.”

그러자 학교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 주기는 했지만, 한의과는 대부분이 장학생인데 그만 제외되었다.

“입학식 날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해 주시데요.”

그 말씀을 듣자 한의과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한의과는 내팽개친 채 철학과나 국문과를 따라 다녔다. 예과에서는 학사 경고를 두 번이나 받아서 한번 만 더 받으면 제적 될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전과의 기회가 한 번 있었다. 그는 이과였지만 문과로 가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시며 그를 불러 앉혔다.

“일반 사람들은 글을 쓰다가 안 되면 노가다라도 할 수 있지만 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가다도 못할 낀데 어찌 문과를 가려 하느냐? 정 글을 쓰고 싶다면 나중에 한의원을 하면서 글을 쓰거라.”

아버지의 말씀은 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원에 가까웠다. 아버지 말씀대로 한의사가 아니라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본과 1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과 2년을 허송세월한 공부를 따라가자니 너무 힘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강 씨라 그의 순번은 항상 10번 안쪽이었는데 아무리 목발로 달린다 해도 10분 만에 이 강의동에서 저 강의동으로 교실을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수님이 출석을 불렀는데 저는 출석이 끝날 때쯤 들어왔기에 매번 지각한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나중에야 교수님들이 그 이유를 아시고 이해를 해 주셨지만. 해부학 시험 중 땡시험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가족들과 알래스카 여행. ⓒ이복남

해부학 시간에는 뼛조각 같은 것을 죽 늘어놓고 지나가면서 그 뼈가 어디에 무슨 뼈인지 뼈이름을 적어야 되는데 목발을 짚고 뼈이름을 적을라하면 땡! 쳐서 적지도 못하고 다음 자리로 가고, 또 적을라 하면 땡! 쳐서 하나도 적지를 못했다. 목발을 짚고 땡! 하는 시간(5초 정도) 안에 지나가기도 힘 드는데 이름까지 적어야 하다니.

“도저히 그 자리에서 뼈를 보고 이름을 적을 수가 없었으므로 뼈이름을 5개 정도를 외워서 적고 또 외워서 적곤 했습니다.”

공부에 있어서는 특별 취급을 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입학불가 장애인인데 입학을 했으므로 다른 사람 다 받는 장학금도 못 받고, 강의실을 목발을 짚고도 10분 만에 뛰어 다녀야 하는 등 이래저래 힘들고 설움이 많았다.

생활은 기숙사에서 6개월 쯤 보낸 적도 있으나 그 외에는 몇 군데의 하숙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동국대에는 동병상련으로 장애인 10여명이 함께하는 청애회라는 동아리가 있었다. 회원들은 모여서 서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근처 시설에 봉사를 나가기도 했다. 제일 많이 했던 이야기는 편의시설이었는데 그 때는 학생으로서 서로의 울분만 토로할 뿐이었다.

그는 한의사가 되면 어려운 장애인 뿐 아니라 장애인복지증진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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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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