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익섭 교수 발인예배에서 조사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국DPI 채종걸 회장. ⓒ에이블뉴스

존경하는 이익섭. 이익섭 회장님. 당신을 떠나보내며 당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 봅니다. 이익섭, 이익섭 회장님.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보내드려야 하긴 하는데, 왜 보내야만 하는지, 왜 이렇게 빨리 가셔야 하는지, 제가 왜 이 자리에 지금 서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어이, 채 원장!’, 이렇게 저를 부를 것만 같은데 말입니다.

회장님! 당신을 기억하시는 모든 분들이 당신께서 살아오신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게 철두철미 하시고 빈틈없는 분이 어떻게 이렇게 황망히 가실 수 있느냐, 일 욕심 많으신 분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두고 어떻게 이렇게 가실 수 있느냐, 도저히 믿기 어려워하며 당신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이익섭 회장님! 여기 모인 모두가 당신을 간절히 원하고 부르면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우리 곁에 다시 돌아 올 수는 없는 것입니까?

또다시 폭설이 와서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면 잠시 더 머물다 갈 수는 있는지요. 당신의 분신처럼 당신 곁을 지켜온 사랑하는 아내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시던 큰딸 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던 막내 리나를 두고 진정 떠나시려는 겁니까? 어찌 그리 빨리 가실 생각을 하셨나요?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너무나 야속하고 원망스럽습니다.

회장님. 당신을 보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장애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종일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이틀간 상주의 마음으로 장애계의 어른들과 활동가들의 조문을 맞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두는 당신을 궁금해 하셨습니다. 당신의 삶, 그 열정, 인간 이익섭을 사람들은 얘기했습니다. 모두들 당신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좋았다 했고, 감사해 했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 당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회장님! 자랑스러운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당신을 되돌아봅니다. 1973년 2월 14일 동아일보 사회면 실명 속 집념의 향학열, 맹인으로 응시 거부됐던 이익섭군내년 서강대에 재응시 준비…, 1975년 1월 23일 동아일보, 맹인학생 이익섭군 연세대 신학과 합격….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차례 대학 입시에 떨어지시고도 최선을 다해 내년에 도전하겠다. 대학에 합격하시고는 연세대에 감사하다. 대학교수가 되겠다. 그리고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회장님! 저희들은 중도장애가 선천적 장애보다 말로 표현 하지 못할, 미쳐버리지 않고는 살수 없는 절망과 고통이 있음을 압니다. 회장님 당신은 사형 선고 같은 실명이라는 장애보다 더 큰 좌절은 준 사회를 향해 장애인은 결코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약속을 자랑스럽게 지켰습니다. 교수로서 운동가로서….

이익섭, 인간 이익섭, 당신의 이름과 삶 앞에는 항상 족쇄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두에게 너무 친근한 애칭이 되어버린 맹인,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장애 운동을 하면서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색다른 모습으로 보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 앞에 놓인 맹인 이라는 그 호칭이 장애인 당사자들에겐 또 다른 희망이었습니다.

회장님, 제가 회장님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시지요? 그것은 당신이 학자이기 이전에, 장애운동을 이끌고 실천해 오신 장애운동가, 저희와 같은 활동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장애대중을 생각했고 장애운동의 기반인 풀뿌리조직을 생각하신 이념과 철학을 가진 장애운동의 리더이자 큰 별이셨습니다.

회장님과의 인연은 정립회관과 DPI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81년 세계장애인의해가 선포되고 이후 한국DPI가 창설이 되면서부터 새로이 시작된 장애운동의 이념을 접할 때였습니다. 송영욱 초대 DPI 회장님과 더불어 장애인의 인권, 자기결정권, 당사자주의 등 장애운동의 철학을 전해주시던 유일한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장애운동의 혼란기에 교단에 계시면서도 한국DPI의 회장님을 맡아 주시고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로 활동하시는 등, 풀뿌리 장애운동, 현장중심의 교육을 실천하셨습니다. 또한 세계장애인연맹의 활동과 동북아의장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셨고, 끝내 NGO단체로는 유일하게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한국대표로 특유의 순발력과 끈기, 리더십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떨치셨습니다. 그리고 세계장애인대회를 개최하면서 권리협약의 성과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빨리 보내게 된 모든 것이 저희들의 불찰이었습니다. 회장님이, 아니 저희가 너무나 간절히 원했고, 하고자 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무리한 일정임에도 뉴욕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고, 수 주 간의 반복되는 회의가 1년이면 몇 차례씩 연속되면서 몸을 돌보지 못해 지병이 악화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수술을 하시고 회복도 하시기전에 일정들을 소화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냥 대단한 분, 철인이라고만 했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라도 좀 더 말렸어야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후배들 중에는 우리 장애인들이 회장님을 너무 부려먹어서 마음이 괴롭다고까지 얘기합니다. 회장님은 장애인의 권리확보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셨다고 회장님을 아는 모든 사람은 얘기합니다.

언제부턴가 회장님의 인터뷰나 기사를 보면 “이제 보이지 않음은 나에게 축복입니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저도 제가 장애를 갖지 않았으면 이렇게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지 않고 적당히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는데, 회장님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닌 새로운 에너지였음을 알았습니다.

회장님! 이 자리에 모여 당신을 보내는 마음들이 고통과 슬픔이지만 당신이 남겨준 그 정신은 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에너지로 희망과 미래를 열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봅니다.

회장님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이 하나 있다면 건강 때문에 포기하셨던 세계DPI의 의장으로, 또한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세계위원회에 참석하셔서 당신이 정말 원하던 일을 마음껏 펼쳐보는 그런 당신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그 역량을 통해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입니다.

저희에게 너무나 큰 욕심이었나요? 회장님! 이제 당신의 빈자리는 어떻게 채워가야 하나요? 당신을 통해 배우고 행동해온 이들은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나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장애인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한다”며 제자들을 이끌어 주시던 당신은 지금 현장을 뒤로 하고 어디로 가십니까? 당신을 보내야 하는 이 슬픔을 어찌해야 합니까.

회장님, 이익섭 회장님!

회장님은 세상을 작은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넓고 큰 가슴으로 세상을 일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실천하셨습니다.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일 많이 하셨습니다. 회장님! 아직도 일에 미련이 남으셨습니까? 진통제를 맞으면서까지 일어서시고 이루려고 하신 일, 무슨 일이 아직도 남았습니까? 이제 편히 쉬십시오. 육신의 고통이 없는 저 편한 곳에서. 장애가 불편하지 않는 그곳, 장애의 꼬리표를 떼고 진정 자유로운 그곳에서 더 큰 꿈을 이루세요. 그동안 당신께서 몸소 보여주신 많은 가르침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넘칩니다. 모든 장애인들의, 장애 인권을 위해 애쓰는 동지들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제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이승의 못다 이룬 한은 저희 남은 자들의 몫으로 돌리시고 편히 눈을 감으세요. 이제는 정말로 편히 쉬십시오. 부디 평안하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이 글은 지난 5일 오전 연세대 루스채플실에서 열린 고 이익섭 교수의 발인예배에서 채종걸 한국DPI 회장이 발표한 조사(弔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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