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제7차 국제장애인권리협약 특별위원회에서 정부대표로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고 이익섭 교수. ⓒ국제장애인권리조약한국추진연대

장애인들이 직면하고 문제를 복지가 아닌 인권으로 풀어내고자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이익섭 연세대 교수가 지난 2일 밤 10시30분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주변에서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안타까운 죽음이라며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운동 리더로 장애인계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고인은 10살 때 시각을 잃었지만 공부에 매진해 1979년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사회복지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아 1993년 연세대학교 첫 시각장애인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됐다. 이후 2002년 연세대 사회복지연구소장을 2년간 맡았고, 2005년부터는 사회복지대학원장을 맡았다.

그는 학자로서 수많은 논문과 연구집을 발표하면서 사회복지 및 장애인복지 분야의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90년 후반부터 한국사회보장학회, 한국사회복지학회,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등에 참여해 지속적으로 활동해왔으며 지난 2004년에는 장애인복지학계의 맏형으로서 초대 한국장애인복지학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2대 장애인복지학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시립대 이성규(서울시복지재단 대표) 교수는 “장애인복지학을 장애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셨는데,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진도를 못 내신 것이 아쉽다. 살아계셨더라면 같이 추진하려고 했는데, 정말 아쉽고 비통하다”고 말했다.

"어떠한 권리라도 스스로 찾아지지 않는다"며 실천을 강조하던 그는 연구실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소아마비협회,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장애인계 현장에 있었고, 지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DPI 회장으로,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로 장애인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병이 악화되자 제자들에게 “연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장애인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2005년 제5차 국제장애인권리협약 특별위원회에서 당시 주유엔 대한민국 대표부 강경화 참사관과 함께 회의장에서 간단한 식사를 때우며 여성조항 신설 미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국제장애인권리조약한국추진연대

그의 뒤를 이어 한국DPI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채종걸(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 회장은 “학자가 단체를 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학자와 운동가 양쪽 역할을 같이 잘 해낸 보기 드물게 대단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제적인 장애인 리더이기도 했다. 한국DPI 회장 재임기간 중인 지난 2001년부터 세계장애인연맹(DPI) 동북아지역회의 의장으로 활동했고, 지난 2007년에는 제7회 세계장애인한국대회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초안이 논의되던 지난 2003년부터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이 성안이 되어 2006년 유엔에서 채택되고 국내에서 비준되는 지난 2008년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하며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정을 이끌었다.

장애인권리협약 내에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우리나라 엔지오 인사들과 함께 장애여성의 권리를 다룬 6조와 자립생활과 지역사회 참여를 다룬 19조, 장애인 이동권을 다룬 20조를 독립조항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조항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나라 엔지오의 리더로서, 때로는 정부 대표로서 모든 것을 바쳤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방콕, 북경, 뉴욕 등을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채종걸 한국DPI 회장은 "외국에 다녀오시면 쓰러지곤 했는데, 또 다시 일어나서 장애인권리협약 특별위원회에 참여하시고 강의까지 하셨다"며 "이 박사님이 안 계셨다면 국제적으로 한국 장애인계의 위상을 널리 알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장애인연맹 회장 시절 국제장애인연맹 비너스 일레건 의장과 제7회 세계장애인대회 준비와 관련한 양해각서에 사인하면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고 이익섭 교수. ⓒ에이블뉴스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채 회장은 “지난 2007년 세계장애인연맹 세계평의회 회장으로 활동할 기회도 있었고,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세계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도 있었는데 건강 때문에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본인의 역량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이루지 못하고, 가셔서 너무나 아쉽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초안을 만드는 워킹그룹에 동행했던 보건복지가족부 김동호 장애인권익지원과장(당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실천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 당시 장애문제를 바라보는 신선한 통찰력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두 번 정도 뵀는데, 2013년부터 시작되는 제3차 아태장애인 10년을 준비하는 회의에 참석해서는 제3차 10년은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본인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독특한 경험을 다른 나라와 공유하면서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에게도 희망이자 빛과 같은 존재로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국립서울맹학교 고등부 7기 동문인 정화원 한나라당 전 국회의원은 “시각장애인들의 큰 별이 졌다”고 탄식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당시 미국까지 건너가서 사회복지정책학으로 매우 유명한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시각장애인 정책에 크게 이바지했다. 지금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슬퍼하고 있다. 매우 정의롭고, 도전정신이 돋보였던 사람인데, 참 아쉽다.”

에이블뉴스 만족도 설문조사 경품 당첨자를 추첨하면서 웃고 있는 고 이익섭 교수. 당시 세계장애인한국대회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에이블뉴스

시각장애인 안마사 위헌 사태를 맞을 당시 마포대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을 찾아가 투쟁사를 하고 있는 고 이익섭 교수. 당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 시절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지난 2005년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지낸 고 장기철씨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고 이익섭 교수.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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