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가 장애인 근로자 및 근로의지가 있는 장애인의 다양한 재능 역량을 계발하고, 장애인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근로 주체임을 사회에 알려 올바른 장애 인식 개선에 기여할 목적으로 지난 2000년부터 ‘장애인 고용 인식개선을 위한 Talent Contes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Talent Contest에는 운문, 산문, 사진, 컴퓨터그래픽, 광고영상/스토리보드 등 5개 부문에 총 348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작품 770점을 응모했고, 1·2차 심사를 통해 총 55점이 최종 선정됐다.

에이블뉴스는 운문, 산문 부문의 입상작 26점을 총 10회로 나눠 소개한다. 여섯 번째는 산문 부문 금상 수상작이다.

은빛 바퀴를 굴리며 세상을 바꾸는 작은 거인

정 진 호(남, 지체)

아직 해도 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눈을 뜨니 창가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 오는 거리는 장애인들이 쉽게 다닐 수 없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걱정이 앞선 하루가 시작된다. 일어나자마자 하루 일정을 정리한 후 대성인쇄소로 내려간다. 대성인쇄소는 장애인들이 모여 일하는 회사로 오전부터 밀려드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고 난 후, 직원들에게 대성인쇄소의 오후를 잠시 맡기고 탑차에 오른다.

휠체어를 싣고 탑차에 올라 40명의 성인장애인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두드림장애인학교로 향한다. 해가 쨍쨍한 날에도 학생들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남보다 배는 더 걸리는 긴 여정을 뚫고 학교로 온다. 비가 오니 많이 못 왔을 거라 생각하며 학교로 들어섰다. 교실은 빗속을 어떻게든 뚫고 도착한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길을 막아서는 괴팍한 날씨도, 험난한 도로도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힘들게 학교에 와서는 힘든 내색 없이 행복해하는 우리 장애인 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지금도 신체적,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배움의 기회를 잃어 한을 담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많다. 읽고, 쓰고, 셈하는 기초적인 것도 알지 못해 어려움에 부딪혀도 말할 곳 없이 서러워하는 장애인들을 지켜보다 힘겹게 세운 곳이 바로 이 두드림장애인학교이다. 이제부터라도 배울 기회를 만들어주자는 마음으로 문을 연 이곳에선 장애인들이 모여 받아쓰기를 하고 구구단과 알파벳을 힘차게 외치며 학업에 열중한다. 그들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며 내 안의 새로운 열정을 느껴본다.

5살 때 세발자전거를 타다 길가의 도랑으로 굴렀는데 그 순간이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줄은 몰랐다. 굴러 떨어지면서 뾰족한 돌에 등을 다쳤고 오랜 세월에 걸쳐 수술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술을 하며 척추 신경이 망가져 영원히 두 다리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두 다리로 걸을 수 없고,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내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예기치 않은 불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저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암담한 현실에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앞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삼육재활원을 다니게 되었다. 삼육재활센터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더 해보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생을 접을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명랑했던 나는 휠체어 마라톤을 시작했다. 운동신경이 좋았기에 휠체어 마라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척추가 굽어 앉은키가 작아 바람의 저항을 덜 받고, 다른 사람보다 팔이 길어 휠체어를 돌리는 빠르기가 남달라 ‘괴물’이라는 별명까지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1회, 제2회 전국장애인체전 휠체어 마라톤에 출전하여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두 차례 이루었다. 휠체어마라톤을 하면서 몸이 불편해 힘들지라도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부딪치자는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난 조각이나 서예에 남들보다 관심이 많고, 눈썰미가 좋았었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배운 여러 글자체를 조각해보다가 우연스럽게 도장을 새기는 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중학교를 마친 어린 날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무척이나 컸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지만, 당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았고 고등학교까지 나온다고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기대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많이 했던 탓에 가세도 기울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곧바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삼육재활원에 있는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스스로 직업훈련소를 선택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끝없이 떠올랐다.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항상 부러웠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직업훈련소 생활을 했고 틈틈이 식당에서 영어 공부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사회에 일찍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의 걸림돌이었지만 현실과 사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사회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도록 애썼다. 삼육직업훈련소에서는 중학교 때 혼자 파던 도장을 장인에게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직업훈련소를 거쳐 갔던 선배들에게 사회생활과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들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로의 첫걸음을 인장업으로 내딛게 되었다.

삼육직업훈련소를 나와 일을 해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장애인인 나는 일할 공간도 넉넉하게 확보하기 힘들었다. 무작정 도장 가방을 메고 시장통을 헤매고 다니며 돈을 벌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학에 다니며 사회를 비판하고 나아가 데모하느라 바쁠 때 나는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고객을 모아 도장을 만들어 주기 바빴다. 거리에서 도장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도장을 파서 6천 원을 손에 받아 들었던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고생 끝에 얻은 돈, 그 돈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나도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구나!’ 그 생각에 힘든 것도 잊고 길바닥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그 거리에서의 기억이, 그리고 그 적은 돈이 오늘날의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되었고, 오늘날의 대성인쇄소를 지탱하는 밑천이 되었다. ‘대성인쇄기획’이란 간판을 내걸고 나와 유사한 장애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앞날에 발판이 되기를 바라며 장애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장애인 직원들이 기거할 기숙사도 마련하여 함께 살아갔고, 함께 일해 나갔다. 하지만 희망으로 시작했어도 현실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사회의 시선 등 어려움이 수차례 찾아와 답답함, 울분과 더불어 부족함을 처절하게 느끼게 했다. 마음과 열정만 가득해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뚫고 나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문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 바로 2002년이었다.

당시‘세움 공동체’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장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팽배한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나갈 아이들의 장애인식을 바르게 심어주고자 교육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 장애인식개선교육의 강사가 되어달라는 제의였다. 제의를 받아들이고 의정부 지역 초등학교를 돌며 장애인식개선교육을 실시했다. 초등학교에 하나 둘 엘리베이터가 생기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점점 바뀌겠구나 생각이 들며 너무나도 기뻤다.

이를 계기로 2006년 올해의 장애극복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동료장애인 고용에 앞장서며 스스로의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나아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 개선 및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기뻤지만, 마음속 낡은 굴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진다고 했던가. 주목을 받을수록 배움의 끈이 짧은 것은 미련에서 부끄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동두천을 벗어나 서울 청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부끄러움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어렵게 입학했다. 교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주부들로 가득하여 조금은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입학했지만 인쇄소 일도 걸리고 편치가 않았다. 매사에 긍정적 사고를 가진 나는 금세 혼란을 접어두고 적극적인 자세로 학업에 열중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을 하고 바로 삼육보건대학 사회복지과에 입학을 하였다.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내 나이 42살에 꿈에서나 그릴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의 문턱을 넘자마자 벌써 내 꿈이 다 이루어진 듯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그 지식을 동원해 장애인들의 진정한 대변자가 되고 싶었던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간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더 편한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때마침 동두천에 전철이 개통되어 나의 휠체어에 날개를 달게 된 듯했다. 혼자서는 갈 수 없었던 학교에 전철을 타고 혼자서 갈 수 있게 되었다. 휠체어에 책가방을 달고 열심히 달렸다.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삼육보건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더 배워서 장애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더 이상 인쇄소를 비워둘 수 없는 실정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서울사이버대학에 입학하였다. 컴퓨터로 강의 듣는 것과 과제물을 파일로 제출하는 것 등 모든 것이 익숙하지 못했다. 입학하고 몇 달 동안은 학교에 직접 가는 것 이상으로 정신없이 헤맸다. 그렇게 헤매고 난 후 학사학위증을 받았고 초절정 파워로 내 삶의 박차를 가했다.

장애인을 위한 거름이 되고자 공부도 하고 지역사회 장애인들을 위해 운동을 하고 다녔다. 동두천 장애인들의 발이 되어줄 장애인 콜택시도 1인 시위를 통해 들여왔다. 몸으로 부딪쳐 얻어내는 성취에 자신감을 얻던 중, 장애인들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장애인들 스스로 깨쳐 나가도록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조차 대학에 목메게 하는 우리나라 현실은 배운 게 없는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많은 세월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성인장애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나이를 불문하고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배움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3월 10일 덜컹덜컹 인쇄 기계 소리가 울리는 인쇄소 위의 작은 공간에 장애인학교를 세우는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한을 몇십 년 가슴에 품고 살아오면서도 부끄러움에 선뜻 학교로 들어서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설득하고 끌어와 처음 마음의 문을 연 5명의 성인장애인과 뜻을 같이해주신 선생님들이 함께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졸 검정고시에 1명이 합격하였다. 합격 소식이 알려지자 하나둘 학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5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는 지금 40명에 이르게 되었다. 학교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교실 3개의 널찍한 학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6년 동안 23명의 검정고시 합격생을 배출하였고,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해도 계속 나와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보다 큰 축복은 없다며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는 장애인 학생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쁨을 주고, 더 많은 경험을 선물하고픈 마음에 휠체어를 싣고 달리던 내 탑차에 파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모은 파지를 팔아 학생들의 소풍비, 수학여행비에 보태어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오전엔 인쇄기계에서 묻은 잉크와 오후엔 파지를 실으며 묻은 때로 손과 옷이 지저분해졌다. 그렇게 나는 검댕이가 되어 두드림장애인학교 교장으로, 대성인쇄소의 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검댕이 때문에 웃음이 더 밝게 빛나 보인다고 말한다. 지금의 나는 또다시 학생들과 함께 꿈을 꾸고 있다.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토대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장애인들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아마 그 날까지 몸에 검댕이를 잔뜩 묻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수학여행 때의 일이 생각난다. 제주도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우리 앞엔 바다로 내려가는 턱 아래 긴긴 계단과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간다 해도 휠체어는 모래 위는 달리지 못해 바다 가까이 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턱 위에 나란히 휠체어 위에 앉아 멀찌감치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돌아왔다. 모두 바닷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좋아하긴 했지만, 아쉬울 따름이었다. 다니면 다닐수록 수없이 많은 턱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 넓은 세상을 나 혼자 다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 장애인 학생들과 함께이다. 모두와 함께 노력하다 보면 사회의 턱도, 길 위의 턱도 조금씩 사라질 거라 믿는다.

사회에서 장애가 키와 몸무게가 서로 다른 것처럼 그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장애가 결코 장애인들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아마 앞으로의 길이 모랫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모랫길에서 낑낑대며 새로운 길을 닦아 나가려 한다. 은빛바퀴를 굴리며 가는 이 길의 끝자락에서 기다릴 희망을 기대한다. 누구든 작고 비틀거리는 몸을 가졌어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은빛바퀴로 앞서 길을 개척하는 그런 작은 거인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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