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다. 시인은 서둘지 말라고 당부한다. 특히 봄밤에는.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뜨는 것은 일상이다. 그런 일상의 나날들을 당황하지 말고 서둘지 말라고 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다짐일지도 모른다.

송성민 씨. ⓒ이복남

기적소리 슬프다 해도 서둘지 말고,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로 인해 슬픔이 찾아들더라도 자신의 걸음걸이를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는 것은 어쩌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일 게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경우라도 당황하지 말고 서둘지 말라는 것이 어디 봄밤뿐이겠는가. 일 년 365일 어쩌면 평생을 두고 당황하고 쫓기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금은 평온하게 살고 싶은데 아직은 세상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은 모양이다.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사람들은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봄밤도 저물어가니 다시 한번 김수영의 ‘봄밤’을 읊조리면서 조금은 더 느긋해 지고 서둘지 않으려고 다짐해 본다.

송성민(1964년생) 씨는 부산 초량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복 공장을 하시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남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족이었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방긋방긋 웃으며 잘 자랐다.

백일쯤에 황달이 왔다. 보통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황달이 오고 일주일쯤 지나면 없어진다. 그런데 웬일인지 백일쯤에 찾아온 황달이 오래 끌었다.

황달은 우리 몸에 빌리루빈이라고 하는 물질이 축적되어 눈의 흰자와 피부가 노랗게 변하는 것을 말한다. 빌리루빈의 양 자체가 많거나 간에서 대사 및 배설에 장애가 생기면 우리 몸에 축적되어 황달이 발생한다. 빌리루빈은 체내에 들어온 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독성 물질이며, 보통은 간에서 해독작용을 거친 후 담즙으로 배설된다.

황달에는 신생아 황달, 모유 수유 황달, 병적 황달 등이 있다. 정상적인 신생아에게 생기는 황달은 생리적 황달이라고 하는데 보통 태어난 지 24시간이 지난 후에 생기며 3일째에 가장 심하고 대개 1~2주 정도 지나면 거의 사라진다. 모유 수유 황달은 모유를 잠시 중단하면 나을 수도 있다. 질병에 의한 병적 황달을 생리적 황달로 오인하여 방치하였을 경우 청력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더 심한 경우에는 뇌성마비가 나타날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제주도 직원 연수에서. ⓒ이복남

황달이 오면서 아이는 고열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어쩔 줄 몰라 병원을 전전했다. 아이를 진찰한 의사도 원인을 잘 몰라서 좀 기다려 보자고만 했다. 부모님은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의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 달 만에야 겨우 황달에서 벗어났다. 황달이 끝나고 열이 식으니까 팔다리가 처지고 힘이 없었다. 부모님은 놀라서 병원을 찾으니 뇌성마비라고 했다.

“부모님은 오만 짓을 다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뇌성마비를 낫게 하려고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가보고, 탕약도 먹이고 굿도 하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해 봤으나 아이의 팔과 다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뇌수술의 권위자라는 A 의사를 찾았다. 아이를 진찰한 A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망설였다.

“수술을 해 볼 수는 있는데 후유증에는 장담 못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며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A 의사가 장담을 못 하겠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A 의사는 그래도 좋다면 한 번 맡겨 봐 달라고 했다.

“잘못하면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부모님은 며칠을 고심하다가 수술을 포기했다.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수술이라도 해 볼 걸, 싶기도 하지만 안하길 천만 다행입니다. 만약 그때 수술을 했더라면 이런 삶을 살아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송성민 씨는 그때 수술을 해 볼 걸 싶기도 했지만, 장애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해 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부모님에 감사합니다.”

그의 장애는 청력은 괜찮지만, 언어는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말은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양손의 손가락이 뒤틀렸다. 그래서 팔은 사용할 수가 있지만 양손은 사용하기가 어렵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손가락보다는 어느 정도 자유로우므로 컴퓨터 등은 발가락으로 하고 바둑도 발가락으로 둔다. 음식을 먹을 때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한다.

아버지는 보수적이었다. 장애아들을 밖에 내놓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목숨과 바꾸고 싶지는 않은 아들이었기에 아들이 철이 들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산수 등을 가르쳤다.

손수건을 단 입학식. ⓒ구글 이미지

송성민 씨의 두뇌는 정상(?)이었고 어쩌면 정상 그 이상을 넘었을 수도 있다. 그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였으니까.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는 한 번도 바깥 구경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초등학교(이하 옛 용어, 국민학교라 함) 입학식에는 하얀 손수건과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매달고 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도 왼쪽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학교에 갈 것이라고 약간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았는데, 손수건은 콧물을 닦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시절의 어린아이들은 콧물을 닦을 만큼 콧물을 많이 흘렸을까. 당시만 해도 손수건의 용도를 잘 몰랐겠지만 하얀 손수건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는 하나의 징표였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란도셀을 매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웬일인지 어머니는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엄마, 나는 왜 학교에 안 보내 주나요?”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엄마, 내가 학교에 가는데 왜 엄마가 슬퍼요?”

그래도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그는 끝내 엄마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엄마는 매일 저를 업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남동생을 키워야 하는데, 그를 학교에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당신네가 먼저 세상을 뜰 것이므로, 아들을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돌보아야 할 사람으로 동생을 생각했던 것이다.<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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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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