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순 씨는 목발이 부러지고 나니 걸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같이 00보조기 가게를 찾았다. 00보조기 사장은 허미순 씨를 살펴보더니 목발을 하지 말라고 했다.

“보조기상에서 목발을 하지 말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목발을 계속 짚게 되면 앞으로는 영영 걸을 수 없게 된다면서 목발 대신 보조기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보조기를 맞췄는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어느 행사장에서. ⓒ이복남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하니 다리는 약간 절었으나 그런대로 걸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자 다리에 근력이 떨어지는지 계단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제가 계단 오르는 것을 힘들어하자 몇 년 전 한 친구가 지팡이를 짚어 보라고 합디다.”

그는 평소 보조기를 맞추는 보조기상에서 지팡이를 구입했다.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했으니 지팡이도 오른손으로 짚는 줄 알았다.

“지팡이는 왼쪽에 짚어야 된다며 아저씨가 시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팡이는 불편한 다리 쪽에 짚는 것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짚어야 불편한 다리를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미순 씨는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했으므로 왼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물론 그동안 보조기는 여러 차례 바꾸었지만.

“예전에 여수애양병원에도 갔었습니다.”

전화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애양병원에 편지를 쓰면 순서대로 답장을 했는지 2년 쯤 후에 애향병원으로 오라는 엽서가 왔다.

“엄마하고 같이 애양병원에 갔는데 수술을 한다 해도 오른쪽 다리를 고치기는 어렵고 그 대신 왼쪽 다리를 잘라서 다리 길이를 맞출 수는 있다고 해서 너무 겁이 나서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소문으로도 여수애양병원은 원체 유명했었다. 그래도 다리를 자른다고 하는 바람에 다시는 안 갔다고 했다.

언니들은 모두 잘생기고 공부도 잘했지만 자신만 못생기고 공부도 못했다. 그래서 늘 찌푸리고 울고 다녔는데 어머니는 학교에 갔다 오면 그를 불러 앉혔다.

“너는 몸이 그러니까 공부를 잘해야 된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그런 태도도 못마땅했고, 공부를 잘하고 싶었지만 공부가 잘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공부를 좀 못해도 기죽고 살면 안 된다. 당당하게 살아야 된다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셨다.

“처음에는 나를 왜 못나게 낳았느냐고 어머니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 하고도 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매사에 소극적이고 남 앞에 잘 나서지는 못했다.

“새아버지가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집세와 하숙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한 남자 어른이 왔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그 남자를 새아버지라고 소개했다.

“새아버지에게도 자녀들이 있었는데 자녀들은 다 커서 따로 산다고 했고. 그래서 새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친아버지가 하도 그를 미워해서 그런지 새아버지는 그를 정말 예뻐해서 참 좋은 아버지로 기억했다.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보다는 아홉 살 아래인데 그 여동생하고는 지금까지도 잘 지낸다고 했다.

새아버지는 공무원이라고 했는데 몇 년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새아버지의 죽음에 저도 많이 울었고 어머니도 엄청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사람은 살아야 했다. 그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는데 갈 곳이 마땅찮았다. 엄마와 언니들은 기술학교를 가라고 했다. 그는 어느 학교를 가야할지 잘 몰랐으므로 언니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범내골에 있는 **기술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는 저 같은 장애인도 몇 명 있었는데, 납땜하고 라디오 고치고 그런 걸 배웠습니다.”

기술학교도 재미가 없었다.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졸업은 했다. 진학 할 곳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xx상업학교에 입학을 했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하숙생들과 결혼을 해서 이미 집을 나갔다.

집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했던 셋째언니가 여상을 나와서 은행에 취직을 했다.

“한번 씩 언니를 찾아 은행에 가면 언니는 빳빳한 새 돈으로 용돈을 주었는데, 언니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셋째 언니는 은행직원과 결혼을 했고 현재는 캐나다에 가 있단다.

“저는 셋째 언니에 대해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상을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을 했다. 어느 날 큰언니가 남자를 소개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멀리 있는 단출하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만나 보니 그 사람도 저를 좋다 해서, 큰언니나 엄마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허미순 씨가 23살이었을 때 27살의 강00 씨와 결혼을 했다. 남편 강 씨는 남포동의 어느 양화점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었는데 월급을 갖다 주지 않았다.

당시 허미순 씨는 어머니와 아홉 살 아래 여동생과 친정에 살고 있었다.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으니 아이가 태어났다. 큰아들(84년생)과 작은아들(88년생)이 있었지만 남편은 돈만 생기면 노름으로 탕진했다.

“남편이 야속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애들은 커 가는데 집에는 돈 한 푼 가져오지 않는 남편이 너무나 밉고 야속해서 자주 싸웠다. 몇 년이 지나도 남편의 노름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남편이 애를 먹이니 아이들까지 말을 잘 안 들었다.

“남자들 셋(남편, 아들 둘)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엄마나 언니들도 헤어지라고 했다. 그도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남편은 멀쩡했던 다리를 약간씩 절고 있었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그까짓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도 아들 둘은 제가 키우고 싶었지만 남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이복남

큰아들은 중학생이고, 작은아들은 초등학생이었는데 눈물을 머금고 아들 둘은 남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막내 동생은 결혼을 하고 그는 수안동에서 엄마하고 둘이 살고 있었는데 취직이라도 해야 되겠다 싶었다. 조그만 회사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을 하던 중 아는 사람이 한국도로공사에 소개를 했다. 한국도로공사 요금수납원이었는데 면접을 보고 취업을 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구서동 톨게이트에 배치가 되었다. 고속도로에는 사람이 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지하 계단을 통해서 다녀야 했는데 당시 지하 계단은 많이 가파르고 열악했다.

“제 다리로는 그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로공사에서 장애인이라고 특별 배려를 해 주어서 1번 게이트를 맡았다. 1번 게이트는 톨게이트 옆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자들에게 손을 들고 “잠깐만!” 하고는 지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편과 살 때 우연히 운전을 배웠는데 도로공사에 취직을 하면서 운전이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은 하루 3교대를 했는데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오후 2시부터 밤 10까지,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근무했다.

도로공사에 근무한지 2년 쯤 되었을 때 남편의 누나 즉 시누이가 찾아 왔다. 동생이 많이 아프니 한 번만 와 봐 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시뉘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2년 전에 헤어질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남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는지 직장도 그만 둔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남편을 보니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시뉘는 그동안 여러 가지 약을 써봤지만 효과가 없더라고 했다. 그래서 xx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고 며칠 있다가 결과를 보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남편과 시뉘와 함께 xx대학병원으로 진단 결과를 보러 갔다.

“근디스트로피입니다.”

의사가 병명을 말했는데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처음 듣는 이상한 이름이었다.

“네에? 그게 무슨 병이에요?”

의사는 근디스트로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유전성이고 진행성인 근육병증으로 점진적인 근위축과 근쇠약이 나타나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유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했다.

“유전성이라면 우리 아들들은 어찌 됩니까?”

지금으로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웬만한 의사들도 근디스트로피를 잘 알겠지만, 그동안 남편은 동네 병원에서 엉뚱한 약을 쓴 모양이었다.

“물론 이혼도 안 한 별거였기에 할 수 없이 남편과 다시 살림을 합쳤습니다.”

그동안 허미순 씨가 없는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친정에서 엄마와 살 때는 일이 필요했으나 남편과 살림을 합치니 이번에는 돈이 필요했다. 허미순 씨는 여전히 출근을 했다. 직장일 하랴 남편 돌보랴 아이들도 보살펴야 했기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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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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