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중국집을 살릴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고심을 하다가 그 중에서 한 가지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시의원 구의원 파출소장 은행지점장 새마을금고이사장 등 이른바 동네 유지들을 초대해서 상요리를 제공했다. 유지들을 초대해서 탕수육을 비롯해서 라조기 팔보채 유산슬 양장피 등을 중국요리를 거나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그리고 행사 때마다 금일봉을 제공해서 그도 조금씩 유지(?)가 되어 갔다.

부산신장협회 회장 박일복. ⓒ이복남

6개월쯤 지나니까 손님이 미어 터졌다. 그의 방법이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손님이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주방장이 곤조를 부리는 겁니다.”

곤조란 일본말 근성((根性)으로 더러운 성질을 지칭할 때나 집요하고 고약한 성질을 말할 때 주로 쓴다.

예약 손님을 받아 놓으면 주방장이 안 나오기 예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다른 주방장을 급조해야 했다. 3년 쯤 중국집을 운영하자 장사는 잘되어 집을 두 채나 샀지만 더 이상 주방장의 곤조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천불이 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식요리사 자격증을 직접 따면 안 될까.

“그건 안 됩니다. 3년쯤 장사를 해보고 느낀 건데 주방장이 직접 장사를 하면 재료를 아끼기 때문에 장사가 잘 안 됩니다. 주인이 아니니까 재료를 아끼지 않아서 음식이 맛이 있는 겁니다.”

중국집을 그만두고 4층 건물을 사서 숯불갈비 집을 차렸다. 포니는 이미 지나간 유물이 되었고 소나타를 사서 낮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사실은 새로운 사업구상이었다. 그러다가 저녁이면 갈빗집에서 숯불을 피웠다. 그가 할 수 일이라고는 갈빗집에서 숯불 피우는 일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숯불갈비 집은 아내에게 맡겨 놓고 건축업을 시작했다. 그 때가 89년이었다.

“사실 건축업에 대해서도 탁상공론뿐인 문외한이라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축주를 섭외하고 땅파기 작업부터 철골 미장 목수 등 20여 가지의 공정을 일일이 챙기다보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래도 사업이라고 시작했으니 밤낮없이 뛰었다.

그럭저럭 집을 한 채 다 지었다. 집을 다 짓고 나니 약간은 자신이 생겼다.

“두 번째 집을 짓는데 속이 미슥미슥하고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습니다.”

2013년 독도교육사 독도 탐방. ⓒ이복남

처음에는 집을 짓느라고 고단해서 그러려니 했다. 며칠 동안이나 그런 증상이 계속되어 하는 수 없이 **병원에서 종합검사를 받았다. 검사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간이 좀 좋지 않으니 운동을 하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을 다 지었다. 무리를 했나 싶어서 개소주를 해 먹었다. 증세는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속이 미슥미슥하고 뒷골이 당기고 나른했습니다.”

동네병원에 갔더니 콩팥기능이 10% 밖에 안 남았다면서 약을 먹으라고 했다. 혈중 포타슘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포타슘(칼륨)은 근육운동이나 심근수축에 관여하는 전해질의 일종이며 만성콩팥병 환자에게는 체내에 축적돼 요독으로 작용한다. 혈중 포타슘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하지근육 감각이상과 마비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심장에 영향을 줘 부정맥과 심장마비로 급사할 수도 있다.

병원에서 약을 먹으라고 했다면 약은 먹었을까.

“안 먹었지요. 그리고 몇 달 뒤에 포항 갔다 오다가 쓰러졌습니다.”

봉생병원에서 투석을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투석은 건강보험도 안 되던 때라 한 번 하는데 8~9만원이 들었다.

“그동안 벌었던 돈을 다 썼습니다.”

가게도 접고 사업도 다 접었다. 투석은 이틀에 한 번씩 하는데 하루는 살고 하루는 죽는 생활이었다.

투석회원 격려 방문. ⓒ이복남

“투석을 하는 날은 기운도 없고 축 늘어져서 거의 초죽음이 되었고, 투석을 안 하는 날은 조금 살만한데 다음날은 또 다시 초죽음이 되니 투석하는 사람들은 하루는 죽고 하루는 사는 인생입니다.”

투석을 하느라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투석기계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아서 투석환자는 얼굴이 새까맣고 투석 중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투석환자들의 얼굴이 새까만 것은 투석기가 불순물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간호사가 갑이고 우리가 을이었는데, 요즘은 우리가 갑이고 간호사가 을입니다.”

그 때는 간호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했다. 그는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정신적 고뇌는 더욱 심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가 하도 실의에 빠져 있으니까 수간호사가 보기가 딱했던 모양이었다.

“투석 안 하는 날 음성꽃동네에 한 번 가보세요.”

왜 무엇 때문에 거기를 가보라는 것인지 그 때는 잘 몰랐다.

“음성꽃동네에 가보니까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디다.”

저런 사람들도 저렇게 살고자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 양산으로 이사를 하고 모든 것은 아내한테 다 맡겼다. 그는 내원사 근처 나무 밑에 돗자리 하나 깔아 놓고 참선 아닌 참선을 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무슨 욕심인가.”

2013년 시민나무심기 행사. ⓒ이복남

양산에서 아내가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렸는데 장사가 잘되었다. 인근에 요즘 같은 편의점도 없었기에 손님이 많았다. 그는 일체 관여를 안 했으나 아내가 장사수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가 돗자리 깔고 참선을 하는 동안 아내는 14평짜리 구멍가게를 45평 슈퍼로 만들었다.

그는 여전히 이틀에 한 번은 병원에서 투석을 하느라고 죽었다가, 다음날은 나무 아래서 돗자리를 깔고 참선을 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같이 투석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투석하는 동안 저염식을 권장했다. 피 속에는 노폐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양분도 있는데 저염식을 하다 보니 못 먹어서 영양실조로 가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투석을 하면서 알고 보니 부산에는 신장협회가 있었다. 그러나 신부전이나 투석환자가 장애인으로 등록도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87년에 설립한 신장협회도 임의단체였다. 투석하지 않는 날이면 가끔 사무실에 나가 일을 도우기도 했다.

“그런 생활이 5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아는 동생이 신장이식을 해 주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였다. 현재는 혈액형이 다르거나 조직이 맞지 않아도 이식을 할 수 있지만 그 때만 해도 혈액형이나 조직이 맞지 않으면 이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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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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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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