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기도 하는 등 그나마 자신을 잘 이해해 주었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리고 어머니는 글을 몰랐다. 그녀는 3~4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글을 알았던 것 같았다.

노선영 신부. ⓒ이복남

그래도 방학 때가 되면 언니와 오빠들은 무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큰오빠는 결혼을 해서 부산에 살고 있었고, 언니들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객지에 나가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부산 큰오빠 집에 갔는데 텔레비전에서 구화학교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한 지 2년이나 지난 후였다. 올케언니에게 구화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올케는 그녀를 구화학교 중학부에 입학시켰다. 친구들은 다 그와 비슷한 농아들이었다. 그녀는 입모양을 보고 말을 배우려고 열심히 따라했다

“저는 구화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말을 하고 글을 배우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착용하는데 그 때 열심히 훈련한 덕분에 약간은 알아들을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고등학교 진학을 안 했을까

“학비가 없어서요.”

그녀는 학비가 비싸서 진학을 못했다고 했다. 현재 특수교육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서 학비가 무료다. 그럼에도 왜 학비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구화학교는 사립이라서 다른가?

필자가 구화학교에 문의해 보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육성회비 같은 것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부산시교육청에 다시 문의를 해 보았다. 특수교육 장학관도 비슷하게 이야기 했다.

아마도 오빠 집에서 올케언니 눈치를 보면서 학교를 다니다보니 학비가 비쌌을 거라고 인식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언니 친구가 소개 해 준 대구 섬유공장에 취직을 했다.

노선영 씨의 결혼식. ⓒ이복남

어릴 때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각장애인으로 살다보니까 그 꿈은 이미 오래전에 온데간데없어지고, 섬유공장에서 하루 종일 베를 짰다. 기숙사에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항상 목이 따갑고 기침이 났다.

“공기가 안 맞아서 내내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공장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월급을 받으면 엄마한테 보냈다. 어느 날 일찍 시집을 갔던 구화학교 동창생 친구가 애기 돌이라고 초대를 했다. 그 친구의 남편도 구화학교 출신의 청각장애인이었기에 구화학교 친구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 중의 한 남자가 그녀를 맘에 들어 했다. 그녀가 처음에는 박용만(1964년생) 씨에게 별 마음이 없었다. 박용만 씨가 집에 가서 뭐라고 했는지 어머니가 그녀를 만나자고 했다.

“마음씨 착하고 예쁘다 하고, 오라고 하더니......”

시어머니가 자꾸 오라고 해서 그녀는 박용만 씨와 결혼을 했다. 시아버지가 목수인데 박용만 씨도 시아버지를 따라서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아무것도 없고, 시집은 부자였어요.”

그래서였을까. 결혼하기 전의 시어머니와 결혼 후의 시어머니는 완전 딴판이었다. 결혼하기 전 시어머니 될 사람은 그녀를 찾아 와서 “착하고 예쁘니 우리 며느리 하자”고 졸라 대더니 결혼을 하고 보니 그녀는 천대받는 부엌데기에 불과 했다.

“가슴을 치고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한다던 남편도 그녀와 시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중재를 잘 하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뭐라고 해도 남편은 먼발치에서 못 들은 척 했다.

“몇 번이나 시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한 번 시집을 갔으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어디선가 얻어들은 윤리와 도덕이 그녀를 옥죄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첫 딸을 낳고 둘째 딸을 낳았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못 살게 굴어도 그녀는 참았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남편하고도 애들 있는 데서는 절대 싸우지 않았습니다.”

애들이 잠든 밤중이면 남편과 옥상에 올라가서 싸우곤 했다. 결국에는 남편이 미안하다고 그녀를 달랬지만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시동생이나 동서에게는 잘 해주면서 그녀와 남편만 푸대접 한 것 같았다. 그녀와 남편은 둘 다 청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한 번은 애기를 업고, 강선생을 만나서 몇 시간 동안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녀가 구화학교를 나오기는 했어도 수화는 선배들로부터 배웠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남편 외에는 수화로 대화를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강선생을 만나서 수화로 하소연을 했다.

“내가 시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노선영 씨가 못 가라고 합디다.”

노선영 씨가 실컷 하소연을 하고는 손을 입에 대더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당겼다는 것이다. 이 동작은 비밀이니 말을 하지 말라, 또는 입에 지퍼를 채우라는 말이란다.

노선영 씨의 4남매. ⓒ이복남

아래로 아들을 두 명 더 낳았다. 아이가 네 명이나 되었다. 어쩌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이 넷을 데리고 버스를 타기가 만만찮았다. 자가용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엄마들이 부러웠다. 그녀도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전면허 시험문제집을 한 권 사서 아무도 몰래 밤에 공부를 했다. 북구운전면허 시험장에서 필기시험 세 번 만에 68점으로 합격을 했다.

잠깐만, 예전에는 필기시험을 수화로 치지 않았나요?

청각장애인은 글은 알아도 문장은 잘 이해하지 못해서 운전면허 필기시험이 어려웠다. 수화도 언어라고 해서 현재 정식 명칭은 ‘한국수화언어법’ (2016.2.3., 제정)이지만 한글문장과 수어문장은 다르다. 단어도 한자어는 더 모른다.

예를 들면 수어로 양손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세운 두 손을 중앙으로 모아 교차시켜서 커튼을 치듯이 하면 깜깜하게 닫힌다는 ‘밤’은 대부분이 알지만 한자어로 된 ‘야간’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점등, 운행, 점멸, 교차로, 신호등 등도 한자어인데다 맞는 것 보다는 틀린 것을 고르는 것에는 더욱 취약했다.

당시 부산남부운전면허시험장 장장(안문웅 경정)은 필기시험에 응시한 청각장애인들이 모두 떨어지고 심지어는 빵점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필기시험 문제지를 1권 선택하여 1달 반 동안 청각장애인과 문맹인들을 위해서 매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강의를 해 주셨다.

그때 통역을 맡은 강주수 통역사는 운전과 관련된 수어 자체가 없어서 온 몸으로 표현하며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안문웅 장장도 출제처에서 시험문제를 강의하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 다음 필기시험에는 강주수 통역사가 필기시험에서 직접 수화통역을 해서 청각장애인이 몇 명씩 합격하기도 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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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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