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방과 후에는 야간자율학습을 했는데 8시가 지나면 다 모여서 공부를 했다.

“다 모인 자리에서 1등을 하는 친구를 훔쳐보니까 노트가 장난이 아니게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애는 선생의 말씀 모두를 적고 있었던 것이다.

“자존심을 구기고 그 친구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 ⓒ이복남

처음에는 그 친구도 싫다고 하더니 그가 사정을 하자 결국에는 허락했다. 그가 아무리 한다해도 1등은 불가능할 테니 그 친구도 승낙을 한 것 같았다. 그 친구 집은 문방구를 했는데 그는 문방구에서 이것저것 사기도 하면서 친구에게서 공부를 지도 받았다.

“그 친구에게서 공부를 배우면서 한사람씩 제끼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 시험에서 그 친구는 1등을 하고 그는 8등을 했다. 그러나 그 친구와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 친구는 다른 고등학교로 갔고 그는 온양고등학교로 갔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는 그런대로 잘 했다.

“한 번은 시험에서 빵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험지를 친구들에게 보여 주다 선생에게 들켰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도 잘했고 키도 컸고 체육도 잘 했다. 고3 때 학력고사를 위한 체력장에 오래달리기가 있었다.

“육상부도 아닌데 2분 50초로 들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육상부에서 는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당시 오래달리기가 여자는 800m 남자는 1000m였다.

그는 금형을 하고 싶었다. 천안공업대 금형과를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다른 과는 가고 싶지 않았다. 재수는 생각도 안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도고호텔에서 웨이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친구를 보았을 때 제복을 입으니까 멋있게 보였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바에 호텔이면 어떠랴싶어서 가겠다고 했더니 과장이 만나자고 했다. 과장을 만나는데 아버지가 같이 가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호텔에 근무했다면서?

“아버지는 주방에서만 근무를 했기에 조리실 외에는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아이스슬레지하키를 처음 시작할 무렵. ⓒ이복남

그의 키는 178이었고 인물도 훤칠했다. 그를 만난 과장은 흡족해 했고 그만하면 아버지도 괜찮다고 했다. 그는 식음료부에 배치되었다. 손님에게 인사하는 법 그리고 서빙 하는 법 등을 연습했다. 물 컵 들기, 쟁반 들기 등 연습해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접시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고 날라야 하는데, 한번은 팔이 너무 아파서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도 너무 놀라고 떨려서 깨진 접시 값은 월급에서 제하라고 했다.

“알고 보니 연습용 접시 값을 웨이터에게 물리지는 않는답니다.”

와인 잔을 나르는 법 그리고 와인 이름과 칵테일 이름 등 배워야 할 것은 계속 늘어났다.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물 컵을 놓고, 그 다음에 주문은 한 단계 높은 선배가 와서 받았습니다.”

그들은 손님이 눈짓만 해도 달려갈 수 있도록 항상 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6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고 그는 연회장에 배치되었다. 5인 10인 100인 200인 등 연회장의 테이블을 세팅하고 연회를 준비했다.

도고호텔에서 1년 쯤 지냈을 때 한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전 유성에 1급 홍익관광호텔이 새로 오픈한다며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월급이 두 배 정도나 되었기에 홍익관광호텔로 갔다.

1992년이었다. 호텔에서는 도어맨과 벨맨이 월급이 많다고 했다. 그는 도어맨을 했다. 도어맨은 말 그대로 손님이 오면 문을 열어주고 짐을 받아서 벨맨에게 인계를 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손님의 차를 주차장에 파킹을 해 주면 된다.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팁문화는 아니지만 파킹에는 항상 팁이 있었습니다.”

도어맨을 하는 선배가 운전면허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선배는 밤마다 충남대학교 앞에서 그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몇 주 배우고 나서 선배가 면허를 따라고 했지만, 손님 차는 파킹을 할 수가 있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고향 아산에서 한 친구가 그를 불렀다. 친구가 다음 주에 입대를 한다면서 토요일에 친구들이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도 신체검사를 받았고 1급으로 입영날짜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토요일 저녁에 선배에게 차를 빌려서 고향으로 갔다.

“친구의 입영축하 파티는 그런대로 잘 치렀습니다.”

그는 내일 아침 근무를 위해 다시 대전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곡각지점을 돌았는데……. 꽝! 그 후에는 정신을 잃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습니다.”

아이스하키 링크에서. ⓒ이복남

깨보니 순천향병원이었고 침대 곁을 지키던 아버지는 한 달 반 만에 깨어난 것이라고 했는데 진통제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한참이나 지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손발은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다. 차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 묶여 있는 것은 그의 두 손이었다. 그에게 두발은 없었던 것이다.

“두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래서 고함인지 신음인지 울부짖었습니다.”

옆에서는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정신이 들자 경찰이 왔다. 무면허 음주운전이라 구속감이지만 한 달 반이나 정신이 없었으니 벌금으로 대체한다고 했다.

보험도 안 되었을 텐데 벌금과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제가 처음 도고호텔에 취직하면서부터 월급의 반을 아버지께 용돈으로 드렸는데 아버지는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적금을 들어 놨더라고요.”

이 대목에서 그는 끝내 목이 메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신이 들수록 내신세가 너무도 어이없어 죽고만 싶었습니다.”

몇날며칠 동안 죽을 방법만 생각했다. 자동차에 뛰어들까.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계단에서 굴러볼까. 수면제를 먹어 볼까 등등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의 두 손은 침대에 꽁꽁 묶여 꼼짝 할 수도 없었다.

죽을 수 없다면 살아보자. 두 다리는 없지만 아직도 내게는 두 팔이 남아 있다. 그는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꿈에도 잊지 못할 1992년 5월 16일. 그날 밤 대전으로 가는 길에 커브를 돌면서 맞은편에서 오던 5톤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의 승용차는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허벅지가 밀리면서 압력이 가해지면 터진다고 합디다.”

그의 양쪽 허벅지가 부풀어 터지면서 온갖 오물과 파편들이 살에 박혀서 안에서 염증이 생겼다.

“오물이 살 속에 박혀 쉽게 제거되지 않아 몇번이나 수술을 하고 아침저녁 드레싱(소독치료)하느라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말뫼에서. ⓒ이복남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봉합해놓은 자리에서 염증이 나거나, 의족을 하기 위해 그나마 남은 다리의 길이를 맞추기 위해 몇 번이나 수술을 더 해야 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버지는 날마다 술을 한잔 하고 와서는 울기만 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미국에 사는 큰고모가 와서 미국으로 가자고 합디다.”

큰고모는 미국시민권자라서 아버지는 의료재활이나 장애인복지가 한국보다는 나을 테니 미국으로 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안 된다고 했을 겁니다.”

그가 두 다리를 잃었을 때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지병이 있어 2년 전에 돌아가셨단다.

재수술 후 봉합이 잘되어 재활의학과를 찾았다. 치료사가 하는 말이 아래층에 그의 또래가 하나 있는데 매일 질질 짜고 울어서 상처가 잘 아물지도 않고 재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놈은 엄마를 들들 볶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매일 술 마시고 와서 울면서 나를 들들 볶고 있는데 그 놈은 엄마를 볶고 있다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니까 나이는 또래인데 프레스에 한쪽 다리의 무릎아래가 절단된 사람이었다.

“지 보다 중한 놈이 웃고 다니니까 지도 이상하다 싶었겠지요.”

그 친구도 그를 보더니 재활을 결심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의족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퇴원했다. 몇 달 후에는 다니던 회사에 다시 취직했다면서 의기양양하게 찾아와서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의족을 했지만 목발 없이는 걸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는 의족을 하고 평행봉재활운동기구를 양손으로 잡고 걷기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 때 뿐이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고향 집으로 퇴원했다. 다섯 달 만이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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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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