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518이 터졌다. 그는 시체수습위원을 하면서 도청 문지기를 자처했다. 수많은 시체들을 점검할 때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한 동생이 어머니에게 전하기를 내일 아침에 진압부대가 들이닥칠 것이니 피하라고 했다.

김근태 화백의 가족. ⓒ김근태 미술관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가 눈물로 애원했지만 아들은 꿈적도 하지 않아서 어머니는 아들을 도청에 남겨두고 울면서 돌아섰다. 다음날 새벽 도청에 같이 있던 친구가 나가겠다며 그를 잡아끌어 마지못해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내를 만났다. 그러나 결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만 마셨다. 그는 교생실습 중이었고 아내 최호순 씨는 광주 교대를 졸업하고 임용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런 술고래 하고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 아내 최호순 씨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친구 남편의 친구였는데 너무나 짠해서 자신이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았단다. 친정 부모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짠해서…….” 김근태 씨와 결혼을 했단다. <짠하다는 ‘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는 표준어지만 주로 전라도에서 사용되므로 전라도 방언으로 알려져 있다. - 필자 주>

최호순 씨는 발령을 받았고 김근태 씨와 결혼했다.

전남여성장애인센터미술치료. ⓒ김근태 미술관

“부산 해운대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첫날밤도 못 치렀어요.”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김근태 씨는 야바위 게임에 빠졌다.

“이기면 장미 담배를 주는 게임인데 근태 씨는 돈을 다 털렸어요.”

돈을 다 날리자 그는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는 죽는다고 난리를 쳐서 어쩔 수 없이 어르고 달래서 - 최호순 씨는 반지 목걸이 등 결혼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고 차비를 마련해서 돌아 왔단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그는 목포에 있는 문태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였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리고 밤이면 술독에 빠졌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짜인 시간대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못 견디게 힘들었다.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하더라구요.”

아내의 설명이다. 그는 미술 교사를 못 견뎌하면서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다.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5년 만에 학교를 그만 두고 프랑스로 떠났다.

김근태 미술관. ⓒ김근태 미술관

“파리 그랑슈미에르 아카데미를 다녔는데 한국하고는 다릅디다.”

우리는 주로 석고상을 보고 스케치를 하는데 그곳에서는 진짜 모델을 보고 스케치를 했다. 그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가슴에 사람들의 얼굴이 각인되기 시작했고 더구나 그랑슈미에르에서 진짜 모델들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내 그림이 저 벽에 걸려 있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의 그림이 루브르에 걸릴 날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돈이 없어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 왔다. 주로 역전으로 나가서 노인이나 노숙자 등 빈민들을 그렸다. 그동안의 생계는 아내가 담당했다.

아내는 빚으로 살았다고 했다.

“내가 선생이니까 대출은 받을 수 있었지만 남편이 돈을 못 버니까 늘 빚에 쪼들렸습니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교직을 사수했다.

“역전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떤 분이 고하도를 가보라고 합디다.”

배를 타고 목포 유달산 아래에 있는 고하도(高下島)를 찾아 갔다. 그곳에 공생재활원이 있었고 지적장애인 150여명이 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미쳐버리는 거죠.”

그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그렸다. 사실은 찌그러진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다.

유병가의 심병난의((有病可醫 心病難醫) 육신의 병은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고치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아이들은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마음은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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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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