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이라는 병명을 알고 다시 S한방병원으로 가서 침을 맞고 내려 왔다.

“침을 맞고 와서 아침에 눈을 뜨니 안 잡고 혼자서 일어나지는 거예요.”

(위)2014년도 금상, (아래)2009년도 금상 수상 후 기념촬영.ⓒ이복남

너무나 놀라웠고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았다. 아, 나도 이제 나을 수 있겠구나. 그동안의 고통과 서러움을 다 날려 버리고 그도 이제 정상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부푼 꿈을 안고 S한방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해서 침을 맞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혼자서 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아무리 기다려도 무언가를 안 잡고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가고 2주일이 가고 3주일이 지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달리기를 잘하던 다리는 한발 또 한발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어야 했고, 야물다던 손끝은 힘이 없어서 천천히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여야 했다.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보니 무릎이 뒤쪽으로 휘는 것 같았고 통증도 심했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수술을 권유했다.

서울의 k대학병원에서 9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만하면 모두 잘 될 것 같았는데 수술은 쉽지 않았다. 1, 2, 3차에 걸쳐 수술을 했으나 아직 사례가 많지 않은  수술이라 그런지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렇게 수술을 했음에도 다리는 전 보다 더 못 쓰게 되어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금전적인 지출도 많아서 후회가 되었다.

“마루타였어요. 수술하기 전에는 그래도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었지만 수술이 오히려 다리를 조진 것 같았어요”

노옥남 씨의 휠체어댄스 및 배드민턴. ⓒ이복남

오른쪽 다리를 수술하고 난 다음에 왼쪽다리를 수술 할 예정이었으나 오른쪽 다리의 수술 실패로 왼쪽 다리는 수술할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내려 왔다.

“우리 집은 부산이라도 강서 쪽 시골의 하꼬방이라 재래식 변소였는데 수술 후에는 다리를 굽힐 수가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구멍가게를 처분하고, 지인들의 주선으로 양변기가 있는 금곡동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수술하지 말고 보조기 하고 재활운동이라도 해 볼 걸.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인생은 마음먹기라더니 그렇게 긍정적적으로 마음을 먹자 한결 홀가분해졌다. 어느 날 자활 후견인 센터 직원으로 부터 한사랑회를 소개 받고 처음으로 휠체어 배드민턴을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 달리기 외에는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어떤 운동이 그에게 맞고 관심이 가는지 알 수가 없어 이것저것 여러 운동을 접해 보았지만 그의 몸에 맞는 운동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분이 파크골프를 권유하던데 골프채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배드민턴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지만 전국대회에 나가려면 의무분류를 받아야 했다. 그를 심사하는 의료진은 콕을 짚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손의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구부려서 콕을 짚지는 못하고, 두 손바닥으로 콕을 퍼 담듯이 올려야 했다. 결국 배드민턴의 의무분류는 원투쓰리(One to Three)의 3등급이 있었는데 처음 그가 속했던 원 등급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배드민턴은 열심히 칩니다.”

그는 등급을 못 받았기에 더 이상 전국체전에는 출전할 수 없지만 그 외의 다른 대회는 상관이 없어 얼마든지 출전할 수 있단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에 사는 친구를 통해 장애인 휠체어 댄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휠체어 댄스를 해 봤는데 비장애인 짝지가 잡아 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휠체어 댄스란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또는 장애인과 장애인의 남녀 커플이 즐거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다.

“국민학교 때 달리기 외에는 체육을 해 본 것이 별로 없는데 장애인이 되어 여러 가지 종목을 거의 다 해 보았고, 그 중에서 휠체어 댄스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휠체어 댄스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협력이라 할 수 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재활을 넘어 재미도 있고 멋지기도 하고, 다른 종목과 달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분장도 하는 것도 정말 맘에 들었습니다.”

처음 휠체어 댄스를 접했을 때 그를 지도한 감독이 그의 자세가 괜찮다고 해서 더욱 힘이 나서 열심히 연습했다.

2009년 전국 체전에 처음 출전하면서 처음으로 거금(?)을 들여 비싼 드레스를 사 입고 춤을 췄다. 꿈같은 시간이었고 처음 출전해서 스탠더드 부문에 왈츠 금메달과 퀵스텝 동메달을 땄다. 2014년 전국체전에서 혼성 스탠더드 왈츠 부분에서 금메달을 땄고, 혼성 스탠더드 퀵스텝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2009년에 처음 시작해서 금메달을 땄고 2014년에 금메달을 땄다면 그동안에는 휠체어댄스를 안 했다는 것일까.

“그건 아니고요. 그동안에도 계속 전국체전에 나갔었지만 짝지하고 맞춰 볼 시간이 없으니까 상을 못 탄 거지요.”

2014년도 휠체어댄스 금상작품. ⓒ이복남

2014년에는 다행히 짝지를 잘 만나서 제법 연습을 했더니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단다.

“처음 휠체어 댄스를 할 때는 국가대표 선수가 돼 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 포기해야겠어요.”

휠체어 댄스가 재미있다면서 포기를 하다니 그 이유가 뭘까.

“우리 같은 사람은 경기가 있을 때만 비장애인 선수와 출전을 하는데 적어도 국가대표선수가 되려면 꾸준하게 연습을 해야 됩니다.”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연습 할 짝지 즉 비장애인 파트너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비장애인 선수에게 월급을 주고 같이 연습할 형편도 아니므로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그동안 장애인계를 잘 모르고 살았는데 2006년부터 해운대자립생활센터에서 동료상담가로 또 권익옹호 활동하면서 대입검정고시도 쳤고, 현재는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지만 사회복지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은 네트워크 사업을 한단다.

만약 네트워크 사업으로 돈을 벌게 되면 장애인 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힘 쓸 것이고 더구나 휠체어 댄스의 비장애인 파트너에게 월급도 주고 싶단다.

“장애인이 된 게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꼭 불행하지마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 아니라면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수로 전국체전에 나가며, 어찌 선생님(필자)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장애인으로서 슬픔이나 고통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그 보다는 기쁨이 더 크고 그래서 오늘도 행복하단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