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졸업 무렵에 패싸움이 벌어졌어요.”

정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이었다. 그에게 맞은 사람의 이가 몇 개 부러졌다. 그동안에 이런 일은 별로 없었는데 상대편에서 요구하는 치료비와 위자료를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막막했고 겁이 났다. 며칠을 고심하다 내린 결론은 ‘튀자’였다. -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입대를 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못 받았는데 해병대 제대 후에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졸업장을 받았단다.

부모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그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남은 가족들은 어쩌려고.

“내가 군대 갔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그는 진해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어 UDT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포항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날마다 술타령이더니 술병으로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비록 큰돈을 못 버는 아버지였으나 그래도 가장이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가 가장이었지만 그는 군대에 메인 몸이었다.

밀양 파크골프장에서 강신기 씨. ⓒ이복남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어머니는 그래도 자식 걱정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으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어찌해야 하나,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고 계신 어머니와 어린 동생 4남매를 어찌 할거나. 그가 탈영을 한들 무엇을 해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나, 탈영을 해서 잡히면 돈도 못 벌고 영창만 살아야 되는데……. 몇날며칠 밤잠을 설치던 그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월남파병이었다. 그는 즉시 월남파병 신청을 했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파병신청을 하고 한 달 여 동안 정글전투에 대비한 훈련을 하면서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이다. 훈련이 끝나고 청룡부대는 부산항 제3부두로 갔다. 1967년 겨울이었다. 출발할 때는 겨울 잠바를 입었었는데 월남의 날씨는 여름이었다.

물론 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집에 말을 했다면 어머니는 분명 월남에 못 가게 했을 것이다. 그는 호이안지구에 주둔해서 수색대로 활동했다.

“날은 덥지요.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

그러나 죽지 않으면 살아야 되므로 죽기 살기로 임했다. 어머니는 그의 파병을 언제 쯤 알게 되었을까?

“한 달 쯤 후에 알았을 겁니다. 국방부에서 어머니 앞으로 월급을 보냈을 거니까요.”

월남으로 떠나는 제 3부두.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어머니에게서 ‘몸 건강히 잘 있다 오라’는 편지가 오기도 했으나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찌는 듯 한 더위와 모기 지네 불개미 등 정글의 날씨와 환경과 싸워야 했고, 언제 어디서 베트콩이 나타날지 모르는 총알이 날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였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시간이 날 때면 그 옛날 유달산을 오르내렸던 어린 시절과 목포의 눈물이 생각났으나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였다. 그런 전쟁터에서 1년 6개우러을 보내고 귀국날짜가 다가왔다. 귀국박스는 주로 미군들의 박스를 사용했는데 갖가지 깡통이나 초콜릿 등이 들어 있는 C레이선 박스와 녹음기와 카메라 시계 등을 넣어서 어머니에게 보냈다.

“고향에서는 귀국박스가 오면 아들이 월남에서 돌아온다고 좋아 했답니다.”

당시 어머니는 목포 삼정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살아왔냐.’ 한 마디를 하시고는 눈물만 흘리셨다.

그는 다시 포항으로 돌아가 34개월의 남은 임기를 채우고 제대했다. 그가 제대 할 때 무렵 월남을 갔다 온 특수부대 출신들은 예우를 해 주는 지 부대에서는 그를 부산의 A사에 경호원으로 추천했다. 그는 대연동에 하숙집을 얻고 A사로 출근을 했다 그는 총무과 소속이었지만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명색이 A사 경호원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하숙집 주인여자가 아가씨를 소개했다. 경기도 살던 이00씨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어 그는 결혼을 했고 2남 1녀를 낳았다.

그가 다니던 A사에서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었기에 할일 없이 월급만 받기가 미안했지만 3년을 버티다가 용호동에 있는 주물공장 기계과에 취직을 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친구들이 서울 가서 한 밑천 잡아 보자고 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평택에 부동산 사무실을 차렸다.

“돈을 잘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설비사업을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부동산을 사고팔고 했는데 아파트를 거래하다보니 아파트의 수도배관과 보일러 등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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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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