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화장지 장사를 시작했는데 남천동에 공장이 있었기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리어카를 끌고 남천동 공장으로 향했다.

“그 때만 해도 화장지가 비쌀 땐데 부잣집에서는 안사고 없는 사람들이 화장지를 사데요.”

큰딸 결혼식날. ⓒ이복남

그래서 화장지 리어카를 끌고 가난한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부잣집에서는 화장지를 많이 사 놓았기 때문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아내는 직장을 나가고 그는 화장지 장사를 했지만 아내의 배가 불러오자 아내는 더 이상 직장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둘째 형의 장인이 부두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둘째 형도 부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둘째 형이 그를 보고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부두에 들어오라고 했다. 둘째 형과 그의 장인의 소개로 부두에 들어갔다.

말은 부두지만 4부두에서 일하는 A회사의 요즘 말로 하면 계약직에 불과했다. 그래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월말이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기쁨이고, 아내에도 떳떳해질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부두에 내려진 물건을 크레인으로 배에 옮기면 그 물건을 받아서 배에 선적을 하는 일이었다.

“회사에 들어 간 지 몇 달 되지 않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에 일을 하면 다른 날보다 수당이 많았기에 그는 한 품이라도 더 벌려고 일요일에 출근하기를 자청했다. 그날은 면포를 싣는 날이었다. 크레인이 부두에서 100kg정도 되는 면포 뭉치 8개를 매달고 배로 옮기면 갑판 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갈고리로 면포 뭉치를 찍어서 선적하는 위치를 잡아 주면 크레인이 그 자리에 면포 뭉치를 떨어뜨리는데 갑판에서 아래까지는 4~50m 정도의 깊이었다.

아내와 마이산 여행. ⓒ이복남

“12월이었고 바람이 몹시 불어서 면포 뭉치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면포 뭉치가 방향을 잡지 못하자 옆 사람이 저에게 비키라고 했는데 면포 뭉치가 저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날 갑판 위에는 8명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식당에 커피도 마시러 가고 어떤 사람은 담배로 피러 가기에 한 두 사람이 자리에 없어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그가 선적 구멍으로 떨어진 줄을 아무도 몰랐다. 3시간 쯤 지난 후에 작업 부반장이 그를 찾았다는데 그는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를 찾기 시작했다. 갑판에서도 선실에서도 식당 등 그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갑판 위에서 선적작업을 하던 그가 사라진 지 6시간이 지났고 짧은 12월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무렵이었는데 갑판 위에서 선적하는 구멍을 살피던 부반장의 눈에 저 아래 면포 뭉치 속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면포 뭉치와는 다른 그 무엇이었는데 아마도 겨울 잠바였던 모양이다.

급하게 사다리를 내려서 내려가 보니 그가 선창에 쓰러져 있었는데 춥고 싸늘한 겨울 날씨에 6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를 발견하고도 끌어 올릴 방법이 없었다. 요즘은 자동 후드(선적 구멍)로 되어 있는데 그 때만 해도 나무후드라 일일이 후드를 다 뜯어내고 의식불명인 그를 끌어 올리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 때가 1981년인데 경찰차를 앞세우고 바로 대학병원으로 갔답니다.”

그는 의식불명이었다. 밤늦게 응급실에 도착은 했지만 일요일이라 전문의도 없었다. 그는 숨을 안 쉬었고 그를 살펴 본 당직 의사도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집사람이 달려 왔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링겔이라도 한 번 놔 주이소.”

어머니는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을 철석처럼 믿었는지 링거라도 한대 놔 주기를 애원했었다. 어머니의 애원으로 의사는 마지못해 링거를 꽂았으나 그래도 숨을 쉬지 않아 영안실로 향했다. 그의 침대는 영안실로 들어 갔고 어머니와 아내는 울면서 침대를 따라 갔는데 영안실에 도착해 보니 시체가 꼬물꼬물 하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다. 움직였다. 어머니와 아내는 비명을 질렀고 그 때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 때 맞은 링겔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다시 응급실로 옮겨졌고 그리고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선적 창에서 오른쪽 어깨 쪽으로 떨어졌는지 오른쪽 어깨와 팔은 박살이 나 있었다.

둘째 딸 졸업식. ⓒ이복남

“정신이 들자 너무 아파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장애를 입게 되면 몇 번씩 자살미수도 한다지만 그는 그를 겨를도 없었다. 너무 아파서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조차 그에겐 사치일 만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짓눌렀고 거기다가 돌아서면 수술이고 또 돌아서면 수술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이란 의대생들의 실습용인지 수술을 받을 때마다 많은 의사들이 수술대를 삥 둘러싸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꼼짝을 못하고 8인실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호자 침대도 없는 타일 바닥에 담요를 깔고 생활하면서 뒷수발을 들었다. 특히 병원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입맛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어머니는 시장에서 그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이나 된장찌개 등을 누나 집에 가서 만들어 오곤 했다. 그러나 보호자 밥은 안 나왔기에 어머니는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걷어서 끼니를 때웠다.

“집 사람은 갓난아기를 업고 처가에서 먹을 것을 훔쳐 오곤 했습니다.”

처가에서 아무도 몰래 음식을 가져왔으니 훔쳐 온 것이 다른 없었다. 아내는 약간의 보증금이 걸려있는 달셋방을 빼서 병원비에 보태고는 염치불구하고 처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처가에서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그가 다쳐서 병원에 누워있자 더욱 더 못마땅해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를 병간호 하던 어머니가 아들의 퇴원도 보지 못 한 채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침에 나갔다가 오전 11쯤 들어 오셔서 내 옆에 바닥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길로 못 일어 나셨습니다.”

장례는 병원에서 치러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하는 수 없이 아내가 병간호를 대신해야 했다.

그는 2년 3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병원비가 문제였다. 그는 산재에 가입도 안 된 임시직이었기에 회사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와 회사의 담당자는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그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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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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