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애를 가졌을 때 그렇게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시어머니는 사과 한 알을 안 사주셨지만 그래도 어머니라 또 속는 셈 치고 들어갔지요.”

그러나 시어머니가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당신에게는 우리 밖에 없다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 김갑술 씨와 아내 김종순 씨. ⓒ이복남

그동안 첫딸과 둘째딸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애가 셋이나 되었는데도 다시 들어간 집에서 시어머니의 시샘과 구박은 여전했다. 그 무렵 누군가가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하지 말고 시골로 가면 영세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이를 악물고 보따리를 쌌다.

울산 시외에 달세 방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소를 한 마리 키웠다. 산에서 소꼴을 베어 내려오는데 남편은 꼴을 지고 앞서가고 아내가 뒤를 따랐다.

남편 앞에 말벌 두어 마리가 윙윙거려서 남편은 막대기로 말벌들을 쫓았는데 남편에게 쫓긴 말벌들이 분풀이라도 하는 듯 뒤에 오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종순 씨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금방 전신이 퉁퉁 부어올랐다. 이웃에서 벌에게 물린 자리는 식초로 씻으라고 했다. 시골로 이사를 가면서 식초 한 말을 가져갔는데 그 식초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소는 새끼를 낳았다.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더니 세 마리가 되고 다섯 마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사간지 5년 만에 소 값이 폭락해서 망하고 말았다. 본전도 못 건지고 갑술 씨는 다시 노가다를 하러 다녔다. 오토바이를 타고 웅촌으로 일을 하러 다녔는데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봉고차와 부딪히면서 한참을 끌려갔다.

“근처 병원에 갔는데 가망 없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종순 씨는 그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왼쪽 다리는 잘리고 왼팔도 완전히 뭉개졌었다.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약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죽었다고 냉동실로 내려 보냈다. 그녀는 냉동실로 달려갔다.

“안 돼요. 우리 신랑 안 죽었어요.”

경비실에서 실랑이를 하고 겨우 겨우 남편의 관을 꺼내서 ‘숙이 아버지요! 숙이 아버지요.’ 남편을 두들기며 소리쳐 불렀다. 한참만에야 남편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세 번이나 있었어요. 나중에는 냉동실 문을 안 열어 주어서 가스통을 들고 와서 병원에 불을 지른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었어요.”

경비가 하는 수 없이 확인이나 하라면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아내는 저승에서 남편을 불러 왔던 것이다.

“그렇게 살려 놨더니……. 정신이 드니까 다리 내놔라, 내 팔 내놔라며, 내 목을 조르고 가슴을 치면서 난리를 치는 거예요.”

갑술 씨는 말을 할 줄은 알아도 종순 씨의 얘기를 듣지는 못한다. 종순 씨는 사고 당시의 기막힌 사연을 얘기하는데 갑술 씨는 알아듣기나 하는 듯이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병원에서는 왼팔도 잘라라 하는데 팔은 안 잘랐어요. 제가 떠신 물에 팔을 담가 계속 주물렀지요.”

그러나 3년 만에 퇴원을 하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갑술 씨는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인데, 왼쪽 다리가 없고, 비록 왼팔을 자르지는 않았지만 왼손은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김갑술 씨의 동판공예 전시회 안내엽서. ⓒ이복남

갑술 씨는 운전면허를 땄고,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마침 동판공예 전시회를 하는 곳이 있어서 찾아가 봤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있던 갑술 씨가 전시회를 둘러보더니 동판공예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동판공예가는 갑술 씨를 보더니 청각장애인이라서 못 가르치겠다고 했다. 그 후 갑술 씨와 아내는 동판공예 하는 곳을 찾아 다녔다. 울산에서도 동판공예를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동판공예를 가르칠 수는 없다고 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갑술 씨는 혼자서 동판공예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동을 판재로 가공을 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뒷면에서 부조형태로 작업을 하면 앞면에는 양각과 음각의 형태로 요철이 생긴다.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해서 양각화도 만들고 부식과정을 거쳐서 착색액을 칠하고 사포나 광택제로 닦아 내기도 했다.

동판작품을 만들어 액자에 넣어 놓았는데 아들이 보더니 아버지 작품이 멋있다고 했다. 작품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놓을 곳이 없었다.

“제가 울산시청에 갈 일이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사회복지과를 찾아가서 남편이야기를 했어요.”

사회복지과에서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전시회를 주선해 주었다. 한마음회관에서 전시회를 하다니, 어찌나 고맙고 감사한지 꿈만 같았다.

그동안 만든 작품으로 1993년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현대중공업 한마음회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의 동판공예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IMF가 왔다. 모두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누가 동판공예작품을 구입하겠는가. 장사도 안 되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른팔까지 붓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까 더 이상의 동판작업은 무리라면서 다시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4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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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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