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시오 슈월쓰는 미국에서 태어나 사제품을 받고 가톨릭 선교사로 부산에 왔다.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기에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을 만나면서 가난한 자들을 보살필 마리아수녀회를 만들고 송도에 구호병원과 소년의집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한국 이름은 소재건이다. 사람들은 그를 소 알로이시오라고 불렀는데, 한국 뿐 아니라 필리핀과 멕시코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한 알로이시오 신부는 1990년 로마 교황청에서 몬시뇰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1992년 3월 16일 필리핀에서 타계하였다.

중학생시절의 강복남씨. ⓒ이복남

2010년은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의 18주기이다. ‘소년의집’ 관계자들은 지난 3월 필리핀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강복남씨도 함께 했다고 한다.

필리핀을 다녀왔다는 강복남씨는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기념관에서 낡은 사진 몇 장을 복사해 왔는데, 사진 속에는 알로이시오 신부와 함께 찍은 강복남 소년의 사진을 비롯하여 부산역 주변의 넝마주이와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강복남씨는 ‘소년의집’에 살았으므로 알로이시오 신부를 자주 만났으나 그 때는 알로이시오 신부가 한국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도 못했다.

알로이시오 신부가 한국말을 할 줄은 알았겠지만 듣지 못하는 그에게는 영어나 국어나 별 의미가 없었고 단지 키 크고 파란 눈의 낯 선 외국인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가 배고프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부님의 미소 짓는 얼굴이 편안한 느낌이어서 큰 은인을 만난 듯 좋았습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열리는 추모미사에도 동행했던 것이다.

상장 임명장 봉침지도사자격증 등. ⓒ이복남

강복남씨가 봉침을 시술하는 모습. ⓒ이복남

당시 '소년의집‘에서는 한 방에 40∼50명 정도가 함께 생활했는데 강복남씨는 ‘소년의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착한 모범생이었다. 그는 ’바오로‘라는 영세명을 받았으나 일반 아이들과 같은 학교가 아니라 남부민동에 있는 부산맹아(盲啞)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맹인들을 만나면 겁이 나서 도망을 쳤으나, 수녀님이 잡아다가 다시 학교에 보내줬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부산맹아학교에서 맹농(盲聾)이 분리되어 청각장애인은 망미동에 있는 부산배화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송도에서 망미동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송도에서 부산역을 지나 망미동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에 다니면서 수화도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선생이 심부름도 곧잘 시켰는데 심부름을 할 때마다 선생은 5원 또는 10원짜리 종이돈을 심부름 값으로 주었다.

나이가 들자 '소년의집’에서는 사회에 나가면 필요할 테니 영어를 잘 배우라고 했다.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어를 잘하면 미국에 유학도 보내 준다고 했는데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안 간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1학년까지는 잘 다녔는데 2학년이 된 어느 날 “이렇게 공부를 해서 뭐하나 싶어 학교도 소년의집도 그만 두었습니다.”

경북 의성에서 맨얼굴로 벌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복남

경남 창녕에서 벌을 돌보는 강복남씨. ⓒ이복남

자취를 하는 농아 선배를 만나 그의 자취방에 같이 살면서 범일동에 있는 프레스공장에 들어갔다.

공부 보다는 돈이 더 필요했고 돈을 벌려면 기술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레스공장은 냄비 등 주방 용구를 만들고 있었는데 눈썰미가 있어서 금방 숙련공을 따라 잡을 수 있어서 사장이 좋아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강복남씨와의 인터뷰는 강주수씨의 통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부분까지는 점심을 먹는 식당에서 이야기했었다. 말을 듣는 사람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귀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손 즉 수화를 눈으로 봐야 되고, 필요하면 자신도 손으로 대답해야 하므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청각장애인과 밥을 먹을 때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렷다.―

소년의집 바자회에서 꿀을 파는 젊은시절의 강복남씨 ⓒ이복남

그럼에도 프레스공장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선배의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하기가 여의치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숙식이 제공되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차량광택 내는 일을 했다. 세차를 하고 왁스를 바르고 기계를 돌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짓 같지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노력했고 무엇보다도 성실했다. 어느 날 양봉하는 농아 선배가 그를 보더니 양봉을 해 보라고 했다. 당시에는 선배도 남의 양봉을 하고 있었지만 선배의 말에 솔깃해서 그길로 선배를 따라 나섰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선배에게서 양봉원 주인 도기학 선생을 소개받아 훈연기 등 양봉기술을 익히면서 처음 양봉을 시작한 곳은 여수 부근에 있는 작은 섬 금호도였다.

밥하고 빨래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양봉기술은 조금씩 늘었지만 무리하게 일을 한 탓인지 허리에 통증이 왔다. 주인에게 허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도선생은 벌침을 시술해 주었는데 몇 번의 시술 후에 허리의 통증이 사라지자 그도 벌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하는 봉침교육에는 매년 참가를 했는데 물론 수화 통역자는 없었다. 통역자가 없어도 알 수가 있고 아픈 곳은 그가 알아낸다고 했다.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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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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