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볼 국가대표 노용화 선수.ⓒ조직위

“제가 론볼 선수들 중에서 가장 오래 선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저를 도와준 고마운 분들 때문에 ‘노용화’라는 제 이름이 론볼 경기장에서 알려지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론볼 국가대표 노용화(49·전남장애인체육회)가 장애를 극복하고 국가대표 선수로서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건, 가족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그는 지금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것을 거의 못 느끼고 생활한다고 했다.

노용화는 1995년 1월에 결혼을 했고, 그해 8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다. 아내의 태속에 첫 아이가 있었을 때 일어난 사고였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마비 때문에 스스로 화장실도 갈 수 없고, 하반신은 감각자체를 못 느끼니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죽고 싶었던 심정뿐이었죠.”

7~8개월의 힘든 시간을 보낸 그가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직장을 휴직하면서까지 제 간호를 해줬습니다. 아내 역시 임신 중에 충격이 컸을 텐데도 오히려 침착한 모습으로 제게 용기를 줬습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의기투합해서 저를 지켜줘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가 처음 론볼을 시작한 계기는 소일거리 삼아 다른 장애인들과 어울려 시작한 재활치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가 1997년에 론볼을 처음 시작했는데, 당시엔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바깥에서 하는 운동이니 활동성도 크고, 성격 면에서도 저와 잘 맞았거든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그땐 론볼 선수층이 얇아서 금방 장애인 전국체전도 나갈 수 있었고, 곧 메이저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거죠.”

론볼이 그의 천직이었을까? 그는 시작한지 5년 만에 2002년도 부산장애인아시안경기대회에서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2004년엔 말레이시아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은메달을 따냈고, 몇 년간 침체기를 겪은 뒤 2011년 남아공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식 은메달, 복식 금메달을 걸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는 특유의 강한 승부근성 때문에 슬럼프가 왔을 때 좌절하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가 2005년~2007년이었습니다. 경기 성적이 많이 좋지 않았어요. 2006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아시안게임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않았던 것이 제일 자존심 상했고요.”

이후 그는 몇 년간 마음을 다잡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다시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날마다 ‘할 수 있다’를 외쳤다. 결국 그는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고, 2014년 두 번째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따냈다.

이번 대회 론볼 남자 단식과 복식 두 종목을 출전 하는 노용화는 당연히 2관왕이 목표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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