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장애인복지가 일천하던 시기인 1989년 자동차가 있고 뜻이 있는 몇 몇 장애인에 의해 부산장애인수송봉사단이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병원이나 나들이 등에 수송봉사단의 차량을 이용했다. 물론 차비는 무료였다.

예전에는 장애인들의 바깥나들이에 차량 봉사도 하고 1년에 한 번 씩은 바깥나들이가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을 모아서 여행을 하는 일종의 문화기행을 했다. 그 시절에는 30년 또는 50년 만에 바깥 구경을 처음 한다는 장애인도 더러 있었기에 눈물겨운 사연도 많았다.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송도 암남공원에서. ⓒ이복남

그러는 사이에 많은 장애인들이 차량을 소유하기도 했고, 여러 단체에서도 차량봉사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장애인콜택시가 생겼다. 그동안 장애인수송봉사단은 단장도 여러 번 바뀌었고, 단원들도 많이 바뀌어 수송봉사단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자 초창기 몇몇의 멤버들이 수송봉사단의 유명무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재정비에 힘을 모았다.

2015년 곰두리수송봉사단이 재정비 되면서 김경철(지체2급) 씨를 새 단장으로 선출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수송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바깥나들이를 처음 해 본다는 장애인들도 거의 없는 터라 다른 방향에서 문화기행을 해 보기로 했다.

봉사단 재정도 회원들의 회비가 전부이므로 크게 벌리지 않고, 작은 문화기행을 기획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제1회 문화기행으로 부산시내 구경도 제대로 못 해 본 새터민에게 부산투어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송도구름산책로. ⓒ이복남

지난 3일 오전 10시. 새터민 10여명 그리고 다문화 2가족, 이들을 봉사하는 부산진구 적십자 봉사원 3명, 그리고 수송봉사단 김경철 단장 등 차량 5대, 필자까지 20 여명이 모여서 출발했다.

부산투어는 송도 암남공원-송도구름산책로-남항대교-부산항대교-오륙도 스카이워크-이기대-광안대교-광안리해변-남천동-황령터널을 지나서 당감동에서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새터민에게 부산투어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필자도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필자는 반주현 단원의 차를 탔는데 그 차에는 새터민 2명이 함께 탔다. 한 분은 젊은 여자 A씨고 또 한 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이었다.

암남공원으로 가는 동안 차창으로 보이는 정발장군 동상 등을 설명하면서 A씨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A씨와 어르신은 같은 기수로 2011년에 왔다고 했다.

송도구름산책로 오른쪽 스카이워크. ⓒ이복남

새터민의 공식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인데 어떤 경로로 들어 왔든지 간에 새터민이 대한민국 내에서 생활하려면 통일부 소속의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거쳐야 한다. 하나원에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초기정착 지원금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원하는 지역을 선택하라고 한단다.

“저 아저씨가 처음에 우리를 맞이했어요.” 새터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저 아저씨’란 수송봉사단원 이윤희(지체 3급) 씨였다.

각 기수 별로 부산에 몇 명이 온다는 것을 부산적십자사에 통보가 오면 적십자봉사원과 함께 이윤희 단원이 부산역으로 마중을 나가서 부산진구 개금이나 기장 등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송도구름산책로 왼쪽 스카이워크. ⓒ이복남

새터민에게는 임대아파트를 주고, 정착금으로 1인 세대 기준 700만원을 지급하고, 6개월간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게 하는데 그 후에는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사업장에서 일하게 되면 수급비는 끊어진다고 했다. A씨는 수급자로 살 때 어느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는데 주인이 처음 계약한 돈 보다 월급을 적게 주어서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구청에서 연락이 오기를 식당주인이 불법취업이라고 고소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A씨는 구청으로 찾아갔다.

“구청에서 그동안 받은 수급비를 환불하라고 하던데, 수급비로 살기가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것마저 토해 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 후에는 구청에서 별도로 연락은 없었고, 현재는 사상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사드 때문에 중국에 수출이 안 되므로 일이 없단다. 예전 같았으면 토요일이라도 이렇게 나올 시간도 없었는데 일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란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기회도 없었다는 것이다.

A씨는 압록강 부근 양광도 출신인데 홍수 때가 아니면 압록강을 걸어서 건널 수도 있는데 요즘은 감시가 심해져서 새터민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가끔 TV방송에 새터민이 나오던데 A씨는 북에 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했다. A씨는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에서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서 같이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남편하고 같이 벌어서 먹고 살고 약간은 북에 있는 친척들에게도 보낸다고 했는데, 북한하고 너무 다른 남한에 사는 게 그래도 행복하단다. 혹시나 하고 장애인복지에 대해서 물어보니 중국에는 약간의 복지혜택이 있는 것 같던데 북한에는 장애인 복지혜택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단다.

어부와 인용의 사랑. ⓒ이복남

암남공원에 도착하자 머리 위로는 시운전 중인 케이블카가 떠가고, 파도는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남공원도 처음이고 이런 경치도 처음이라고 했다. 특히나 A씨는 양광도가 산골이라 바다를 보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송봉사단 단원들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수송봉사단원들도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되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두 번째는 스카이워크가 있는 송도구름산책로였다. 새터민이나 다문화가족이나 적십자봉사원 등은 보행에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라 구름산책로를 지나고 거북섬을 건너서 스카이워크를 돌아 나왔으나, 장애인인 수송봉사단원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송도구름산책로 스카이워크는 거북섬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 200m, 왼쪽이 165m라고 했다. 그런데 거북섬은 울퉁불퉁한 바위로 되어 있어 장애인은 지나갈 수가 없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가는 길. ⓒ이복남

거북섬에는 전설과 함께 인용(魚龍)과 어부(漁夫)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설의 내용인즉 어느 날 어부가 용굴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주었는데 여인은 용왕의 공주였고 바다괴물과 싸우다가 그렇게 되었다. 그 후 공주는 사람이 되어 어부와 살고자 천일기도를 드리는데 마지막 날에 바다괴물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어부 또한 공주의 원수를 갚고자 바다괴물과 싸우다가 바다의 혼이 되고 말았다. 결국 공주는 사람이 되지 못한 체 인용이 되고 말았는데 이를 가상케 여긴 용왕이 어부를 거북바위로 만들어 인용과 함께 살게 하였다. 그 후 거북섬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수복(壽福)을 주고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결실을 이루게 해 주었다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남항대교와 부산항대교를 지나서 오륙도 스카이워크로 갔다. 역시 수송봉사단원들은 스카이워크로 가 볼 엄두가 없었다. 필자는 지난번에 오륙도를 와 보았기에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둘러보니까 ‘오륙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 계단 가장자리에 표식을 했는데 전체에는 하지 않고 몇 군데만 해 놓아서 아쉬웠다.

관광안내소의 표식을 한 계단과 예전계단. ⓒ이복남

요즘 오륙도는 관광지라 사람들이 엄청 많았고 주차장도 만원이었는데, 그래도 주차관리원은 장애인 차량은 알아보고 주차를 시켜 주었다. 새터민들을 기다리는 동안 한 봉사단원이 얘기를 하기를, 얼마 전 어떤 차가 앞을 가로 막고 있어서 주차를 할 수 없기에 너무 화가 나서 신고를 했단다. 장애인전용 주차구역에 주차를 하면 벌금 10만원이지만, 주차방해를 하면 50만원이다. 그랬더니 주차방해를 한 그 차량 주인이 아주머니인데 사흘 동안이나 찾아와서 잘 모르고 그랬다며 한 번만 봐 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하더란다. “50만원 내면 되지, 왜 그랬데요?” “50만원이 없는 모양이지요.” 그래서 고소를 취하해 주었다나.

다음코스로 용호동 이기대로 해서 광안대교를 거쳐 광안리 해변으로 갔다. 시간이 없어서 해운대는 가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광안리 해변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대부분이 처음 보는 풍경이라고 했다. 광안리 해변에서 남천동을 지나 황령산 터널로 해서 당감동 식당으로 갔다. 대부분이 삼계탕을 시켰고 두 사람은 밀면을 주문했다.

삼계탕으로 점심식사. ⓒ이복남

다문화 두 가족은 베트남 여자였고 아이들도 데려 왔다. 두 분 다 한국에 온 지 10 여년이 지나 우리말을 잘 했다. 그들은 한국국적을 가지면서 이름도 김미선(34), 김윤희(32)로 변경 했는데 김미선 씨는 베트남 이름이 ‘쩐티미자우’라고 했다. 두 분 다 두 자녀가 있었는데 김미선 씨는 10여 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셨다고 적십자 봉사원이 귀띔해 주었다. 한국에 살면서 무엇이 제일 어려웠는지를 물었더니, 어려움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어가 어렵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외국어는 다 어렵지 않을까.

부산 구경을 처음 해 본 새터민과 다문화 가족들은 구경 잘 했다며 수송봉사단 단원들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물론 필자는 여러 번 가본 곳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부산 구경 한 번 잘 한 것 같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수송봉사단에서 각자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번 문화기행이 시작은 비록 미미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안겨 준 것 같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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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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