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나는 쌀가마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한 움큼 쌀을 움켜쥔다. 도대체 이 쌀 한 움큼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까.

나는 거기까지 도달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다. 쥐었던 쌀을 가마니에 털어 넣고는 손가락으로 쌀 한 톨을 집어 올린다. 쌀 한 톨에 깃든 이야기라도 지면에 온전히 담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할아버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사셨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다. 밥 한 끼 편안하게 앉아서 드실 처지가 아니었다. 장성해서도 할아버지는 이리저리 떠돌면서 옹기를 팔아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있어 농토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나무만 대지에 뿌리박고 사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뿌리박을 수 있는 토지를 간절히 희구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할아버지는 당신의 토지를 장만했다. 그때의 기쁨이 얼마였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생전에 할아버지가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은 농토가 그분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피와 땀과 눈물을 전부 토지에 쏟아 부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그해 겨울이 나에게 더욱 혹독했던 것은 할아버지가 병마와 싸우고 계셨기 때문이다. 죽음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안타깝고 저릿해서 내 숨통을 끊어놓을 것만 같았다. 나는 숨 막힘에 허덕이며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대문에 조등이 걸렸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안방 문을 열면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들려올 것 같았다. 마당에 돗자리가 깔리고, 문상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할아버지의 임종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기 때문이었다.

매서운 추위가 살갗을 파고들자 나는 차츰 할아버지의 임종을 절감했다. 칼바람이 몰아쳤다. 오싹오싹,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상객으로 가득한 마당 한복판에서 나는 휘청거렸다. 할아버지는 인연의 끈을 놓고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었다. 나는 밑바닥 없는 슬픔에 빠져들었다.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를 부축했다. 나는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앞에 밥 한 공기가 놓여졌다. 슬픔으로 목이 잠겨 밥이 목구멍에 들어가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면 어떻게 수저를 들겠는가.

문득 나는 밥 그릇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봤다. 나는 손으로 밥그릇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 순간, 밥 한 공기의 따스함이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앞에 놓인 밥 한 공기가 할아버지의 삶이며 사랑인 것이다. 나는 밥알을 꼭꼭 씹어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나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그해 겨울의 밥 한 공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할아버지가 내게 허락한 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쌀 한 톨의 의미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밥 한 공기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알찬 삶을 영유할 수 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랑이 절실한 계절이다.

*이글은 전북 전주에 사는 최일걸 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최일걸 님은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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