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조항 통과를 기다리며 손을 꽉 잡은 우리나라 장애여성들. <에이블뉴스>

국제장애인권리조약안에 장애여성 단독조항이 통과된 것은 회의 마지막 날이던 8월 25일 오후 5시 20분이었다.

탕탕탕, 의장의 의사봉이 들리는 순간 회의장의 아래 위층에 포진하고 있던 장애여성들의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의장석의 진행단과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정부대표단들이 환호성이 들리는 뒤쪽을 일제히 돌아다보았다. 그들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회의장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옆의 김광이씨를 끌어안았고 저쪽 끝에 있던 김미연씨는 유럽 장애여성의 핵심멤버 리디아와 눈물어린 포옹을 하고 있었다. 리디아를 비롯한 유럽 장애여성들은 처음에는 장애여성 단독조항을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회의장 의제는 금방 다른 조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도 이상한 그 울렁거림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나는 멍한 느낌이었다.

장애여성 단독조항에 들어간 것은 단지 두 항에 불과했다. 문장으로 보아도 길긴 하지만 단지 두 문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아직도 젠더 센스티브(gender sensitive)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우기는 나라들에 의해서 그 구절은 삭제되었고, 또 하나의 항목으로 제시했던 임신, 출산, 성생활 등에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장애여성의 재생산권(reproduction)도 일찌감치 없어진 다음이었다.

그런데 단지 이 두개의 문장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함께 내내 핍절되어 있었고 억압당해왔던 장애여성들의 정당한 권리를 담보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르게 저 혼자서 울렁거리고 있는 뜨거운 가슴을 잠재우기 위해서 나는 이 진지한 의문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헤프게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차갑게 진정시켜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장애여성의 단독조항의 제정에 크게 기여한 바도 없거니와 크게 삘을 받았던 적도 없었다. 법문이나 세밀한 조항을 어려워하는 탓도 있고, 또 유럽 쪽의 잘난 사람들이 주장하는, 전체 조항 속에 장애여성의 관점을 담아 가야 한다는 메인스트림(mainstreaming)이라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더할 나위없는 것이어서 그걸 깨고 나갈 여지를 우리 측에서 만들어낸다는 것이 애초부터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나라는 해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끈질긴 장애여성들이 세련된 선진국 장애여성들과 전문가들의 이론적으로 완벽한 반대를 이겨내고 제6조, 장애여성의 별도조항과 전체 조항에 장애여성의 관점을 실어내는 병행추진방식(twin track approach)을 마침내 성사시켜낸 것이다.

3차 회의 때 우리나라에 의해서 제안되었던 장애여성 단독조항은 권리조약 특별위원회 회의가 열리는 내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마지막 회의이던 이번 8차의 3일째 되던 날, 멕케이 의장의 강력한 지지와 함께 거의 확정되다시피 했다. 이 날 이미 많은 나라들의 대표들이 장애여성의 초안을 잡고 마침내 조항을 만든 코리아에 대한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리를 볼 때마다 콘그레츄에이션!!! 이라고 외쳐주는 많은 장애인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EU에서는 두 항목을 한 항목으로 줄이는 것을 아직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예 없애려고 하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리측 장애여성들은 꿋꿋하게 WIDC(International Disability Women's Caucus) 회의에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은 건강이나 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억압의 문제로 보고 장애여성의 고유한 특성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유럽의 한 장애여성은 코리아 장애여성들은 유난히 임신, 출산 문제에 묶여 있는 것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다음 날 바로 깨어졌다.

다음 날, 6조 장애여성 조항의 사이트 이벤트가 개최되었는데 참석한 아랍과 아프리카, 아시아 장애여성들이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구성원이기는커녕 가족의 구성원도 될 수 없는 그들의 환경과 그로 인한 결혼, 임신, 출산에 대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경험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130여명의 장애여성들은 피부색과 장애유형과 나라를 뛰어넘어서 서로에 대한 공감으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여장연의 성폭력 상담소와 쉼터에 관한 소개를 할 때에는 부산하던 통역조차 조용해질 만큼 집중되는 하이라이트를 받았다. 우리의 뼈아픈 경험은 전 지구촌 장애여성 모두의 뼈아픔이었고 우리한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그들에게도 이 순간 절실한 필요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라를 넘어, 대륙을 넘어서 외치고 있는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 속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불과 1, 20년 전만 해도 우리들이 지르던 그 신음소리였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속에서 질러지고 있는 절규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랬다. 우리의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장애여성 단독조항을 주장할 때, 중세기도 아닌 대명천지 밝은 시대에 무슨 여성조항이 따로 필요한가, 라고 미개인 바라보듯이 바라보던 선진국 장애여성들의 앞서나가는 관점과 젠더 센스티브가 무슨 말인지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개발국 여성들의 딱 중간 지점에 우리나라 장애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완성된 인권의식과 구비된 사회적인 제도로 인해 구태여 뭉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선진국 장애여성들과 장애여성이 어떻게, 왜 뭉쳐야 되는지도 모르는 채 신음하고 있는 인권개도국의 사이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 상이할 만큼 달라져 있는 두 문화와 간격을 가로지르며 그 경계지점에서 양쪽의 가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 장애여성운동이 도달한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나라처럼 장애여성 자조단체가 활성화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우리처럼 자기 주머니를 털어가며 뉴욕까지 날아오는 장애여성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국회의원 몇 명씩이 한꺼번에 UN으로 날아오기도 하고 (7차, 8차 회의) 장애여성운동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장애여성 의원이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단독조항 지지연설을 하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어쩌면 경이로움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우리나라의 모습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장애여성 단독조항을 처음으로 제안했고, 그리고 마침내 성사시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운을 뗀 것처럼 장애여성 단독조항은 불과 두 문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조항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지난 4년 동안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고, 그리고 서로 다른 지점을 확인했고 또한 다시 공감하기를 거듭해온 것이었다. 이러는 과정에 전 세계의 장애여성들이 만났고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서로의 목표가 다르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자산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물론 나 스스로가 이 과정에 모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활동의 가장 최전방에 김미연씨와 김광이씨가 있었고 장애여성단체로는 여장연이 처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해나왔다.

이런 말을 새삼 하는 이유는 권리조약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못한 대다수 장애여성들의 아쉬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태여 부언을 하자면, 최전방에 있었던 핵심 멤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과 아울러 그 누구도 장애여성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도록 이미 역동성을 만들어낸 우리 대다수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앞서서 맹렬하게 뛸 수 있었던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장애여성 대중들의 간절한 소망과 열정이 쌓이고 쌓여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으로 하나의 긴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온 일보다 앞으로 해나갈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단독조항이 만들어진 것은 장애여성의 인권에 대한 근거가 되는 초석을 깔아놓은 것뿐이다. 앞으로 그 작은 초석 위에다 어떤 형태의 구체적인 건축물을 올리고 그 건축물 안에 어떤 풍요로운 콘텐츠를 담을 것인지는 각국의 장애여성 당사자한테 주어진 과제물이다.

기왕 권리조약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던 세계장애여성들이 이것을 근거로 해서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연대를 구축하며 우정을 만들어나감으로써 여태까지 생활반경이 좁았던 우리 장애여성들이 지구라는 큰 무대에서 역동적인 구성원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인사의 말씀

그 동안 글을 읽고 공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동안 너무 오래 칼럼을 비워두었던 것을 새삼 죄송스럽게 생각하구요. 다음에는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또 열심히 살아 볼랍니다~ 꾸벅~~~^ ^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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