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B그룹에 속해 있던 진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나는 내심 놀랐는데, 진기는 심하게 말을 더듬기 때문에 보통 토론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지, 말없이 그냥 한구석에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나 다른 학생들은 진기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진기는 말을 더듬으며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잠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진기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했지만, 말더듬 증상 때문에 그가 어렵사리 하는 말은 어쩐지 더욱 진지하고 진실 되게 들렸다. 잠시 쉬었다가 진기는 다시 입을 열어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 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

윗글은 고 장영희 교수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 중 “눈 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란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장영희 교수님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니며 거동이 불편했지만,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훌륭한 글들을 많이 남기셨다.

2002년에 나온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은 샘터에 연재해온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으로 책 전반에 흐르는 정서와 귀한 문장들은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매일 업어서 학교를 등하교시켜주시던 어머니 이야기, 장애 때문에 지원이 어려웠던 학교들의 입학이야기, 미국유학시절의 이야기들이 담담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그려져서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스스로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미국유학 이후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은 이야기들이 종종 수필의 주제가 되기도 하는데, 윗글에선 영문학과 토론수업시간에 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곧 핵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핵폭발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동굴이 하나 있고, 아래 있는 열 사람이 그 동굴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에는 꼭 여섯 명밖에는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므로 생존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한국, 아니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할 것을 감안하여, 다음 열 사람 중에서 여섯 명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

수녀 (종신 서원을 했으므로 결혼할 수 없는 상태)

의사 (공산주의자)

눈먼 소년

교사 (일본인)

갱생한 창녀 (그러나 언제라도 이전 생활로 돌아갈 소지가 큰 상태)

여가수(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남)

정치가

여류 핵물리학자

농부 (청각 장애자)

나 자신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없는 백수 상태) 」

이런 토론을 영어로 하는 수업시간,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이 수필은 마지막에 크나큰 감동을 준다. 이 토론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어져서 가장 설득력 있는 토론을 벌인 A그룹과 B그룹이 마지막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진기의 말은 눈먼 소년에 대한 토론을 종지부 시키는 멋진 발언이었다.

「A : 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고, 여섯 명 모두 어떤 형태로든 공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B : 눈이 멀었던 안 멀었든 간에, 그는 아직 어린 소년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무조건 어린이를 먼저 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A :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소년의 경우는 너무 어리고, 따라서 육체적으로도 약하고,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도 없는데다가 볼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나라 세우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B : 그러니, 결국 눈이 멀어서 안 되겠다는 말 아닙니까?

A :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죠. 소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에 아주 바쁠 겁니다. 누가 소년을 돌본단 말입니까?

B : 그러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유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인간은 가끔 잔인한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약한 자를 동정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A : 물론 우리도 소년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감상적이 되면 안 됩니다.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여섯 명이 힘을 합해 강하고 살기 좋은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새로운 사회는 시작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겁니다. 그런데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B그룹은 마땅하게 논박할 이유를 들지 못했다. ‘동정과 인간애’에 대해 몇 명이 더 거들었으나, A그룹의 실리적인 측면을 꺾을 만큼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분위기로 보아 A그룹의 논지가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이후에 진기가 손을 들어 한 말이 이 수필을 영원히 마음에 남게 만들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불안할 때면 잠시 이 수필집을 펼치고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사람’이 없고, 기계가 대신하며, 인건비를 줄이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존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삶은 팍팍해져간다. 생존회로를 온건히 작동시킬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피폐해가고, 연일 뉴스에서는 끔찍한 사건들만 보도된다. 전쟁과 테러 같은 물리적 실체를 접하지 않더라도, 생존경쟁의 한 가운데에 서서 여유라고는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오랫동안 전쟁터에 노출된 심경이나 마찬가지이다.

뤽 베송의 영화 <제5원소>의 여주인공 릴루가 “전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은, 구원할 가치가 없다”는 마음을 되돌려서 지구에 접근하는 거대혜성을 파괴하여 지구 멸망 3분 전에 지구를 구하도록 만든 것은 남주인공 코벤 달라스의 사랑이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모두가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돕는 일,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게 되는 것” 그것은 결국 이 지구를 구하는 <제5원소>, 생존 경쟁에 지친 내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되살리는 귀한 가르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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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맘이자 새로운 세계, 장애아동을 키우는 삶에 들어선지 10년째다. 아들이 네 살 때 발달장애인 것을 인지하고 1년 휴직하며 아이 교육에 힘쓰는 한편 아이의 장애등록에 따른 고심과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 등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장애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오래 가는 “길 장(長), 사랑 애(愛)” 임을 깨닫게 된다. 어린이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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