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아직도 살아 있는 환상통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kbs 방송 화면 캡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불화살 같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찌르듯이 아팠다. 아픔을 느낄 눈이 없는데도 불화살 같은 햇살 때문에 느끼는 통증이었다.

"아, 환상통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23년 전, 그 날도 햇살이 눈부시게 대지에 쏟아지고 있었다. 집중호우가 그치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던 7월 20일. 그 날의 햇살은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대지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굉음과 섬광…. 그리고 내게서 색채와 형태를 지워버렸다. 빛의 아름다움마저도 지워버렸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고통이었다. 동공을 파괴한 수류탄의 파편은 집요하게 고통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절망을 부추기는 고통, 고통을 참아내어도 그에 따른 보상은 절망뿐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의 신경세포까지 통증으로 전율케 했다.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아직도 살아 있는 환상통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내게 주어진 고통 끝에는 벅찬 희열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 환상통이 일깨워주었다.

“인백 씨, 내 손을 잡고 일어서. 우린 달려야 하잖아.”

인백 씨의 손을 잡는 순간, 의지를 초월한 원초적인 기운이 교감되었다. 인백 씨와 나는 살아있다는 본능의 힘으로 오르막을 올라갔다. 다행히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 데다 오르막의 길이도 짧았다. 코스 개설자에게도 한 가닥 배려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육신을 무너뜨릴 것 같은 피로가 통증까지 누르고 있었다. 두 번째 체크 포인트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두 시간은 더 가야 하리라.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다고 해서 피로를 풀 수 있는 휴식이나 그 밖에 레이서를 위해 준비해 둔 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구간의 어느 지점, 얼마만큼의 거리를 주파했다는 데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만족감뿐이다. 그래도 체크 포인트가 기다려지는 것은 희망을 예시해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2000년, 남북통일 민족화해를 염원하며 백두산과 한라산을 등반해 백두산의 흙과 물, 그리고 한라산의 흙과 물로 합토(合土), 합수(合水)제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해가 저무는 겨울 전주KBS로부터 새해맞이 지리산 종주등반 제의를 받았다. 노고단을 출발해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주능선 종주등반이었다. 눈이 쌓인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의 연봉을 넘는 겨울 산행은 처음이었다. 3박4일은 앞을 못 보는 내게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때까지 겨울 등반 경험이 없었기에 자신감만 가지고 동의를 했다.

노고단을 출발해 반야봉을 비껴서 가는 주능선에는 거의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안내견 찬미와 함께 출발하면서부터 눈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특히 안내견 찬미는 네 다리가 눈 속에 묻혀서 헤쳐 나오지를 못했다. 경사가 가파른 토끼봉 능선을 오를 때는 셀 수도 없이 비탈에서 굴렀다. 연하천, 세석평전, 장터목 등에 있는 산장을 지날 때마다 다음 산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다녔다.

방송사에서 주관한 이벤트 행사여서 새해 첫해가 떠오르는 시점에 맞춰 많은 등산객이 천왕봉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예정만 없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비탈에서 구르기를 셀 수도 없이 하다 보니 바위에 부딪힌 무릎의 통증 때문에 걸을 수가 없었다. 눈 쌓인 고원의 능선과 봉우리를 기다시피 해서 2001년 첫 해가 뜨는 시점에 맞춰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다.

그 때 고난의 겨울산행을 하면서 해방공간에서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이념투쟁을 벌였던 빨치산들을 생각했다. 그 이데올로기의 신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엄동설한에 추위로부터 몸을 감싸줄 의복이나 신발도 없이 산 속에서 버텨야 했던 그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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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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