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극단 휠 2010년 하반기 정기공연 '춤추는 휠체어' 공연 장면.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연극에서 맞닥뜨린 나의 가장 큰 과제가 '감정 표현'이었고, 연출 선생님을 심난하게 하는 과제가 '여주인공의 부족한 연기력'이었다면, 모든 장애인 극단과 장애인 배우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장애인 배우의 사회 참여'와 '연극의 프로페셔널리즘' 사이의 딜레마일 것이다.

장애인 극단의 연극 무대는 단순히 연극을 하는 무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 극단에는 풍부하고 섬세한 표현력을 가지고 감정적 몰입을 하는 배우,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연기를 전공한 배우 등 뛰어난 배우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일반 연극 무대는 물론 사회 참여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연극을 통해 나를 포함한 장애인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매력적인 경험을 하고,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능동적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인 극단인 동시에 '상업 공연'을 하는 극단이기도 했다. 수백만원의 대관료를 내고 대학로의 소극장을 빌리고,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티켓을 판매했다. '자선 공연'이 아닌 한, 장애인이 무대에 선다는 사실만으로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더 나은 연출력과 연기력으로 대중에게 어필해 '이익'을 창출해내는 공연을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일단 극단과 마찬가지로 배우들에게 혹독한 트레이닝이 요구된다. 공연을 몇 주 앞두고 우리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연습을 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고, 이것이 장애인 배우에 대한 차별이나 '학대'가 아니냐는 불만도 조심스럽게 터져나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주인공이 될 때 우리가 그어놓은 한계 이상으로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수많은 악당과 괴물을 단칼에 물리치고, 깊은 늪과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산을 넘어 공주를 구해낸다. 나는 그 주인공들이 원래부터 대단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주인공'이 되어 한계를 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연극 무대이다.

연극 '춤추는 휠체어'에서는 공간의 전환을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삼각 프레임을 사용했다.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연극 무대는 상상력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공간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삼각 프레임을 사용했다. 각각의 프레임은 식탁이나 침대, 욕실이 되기도 했고, 배치와 방향을 바꾸면 정원문이나 비밀의 문이 되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화려한 정원수를 표현하기 위해 초록색 넝쿨 옷을 입은 배우들이 춤을 추었고, 정원수들이 춤을 추며 프레임을 회전시키면 장면이 전환되었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한정된 공간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한계가 있다. 영화 속에서 정원 장면이 필요하면, 직접 정원을 촬영하면 된다. 여기에는 어떠한 상상력도 없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연극 무대에서는 다양한 정원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창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결국에 무산되었지만, 우리 연극은 처음에 커다란 동화책인 배경의 페이지를 넘겨 장면이 전환되도록 기획되었다.

만일 이같은 연출이었다면, 전혀 다른 느낌의 '춤추는 휠체어'가 되었을 것이다. 연극은 배경이 되는 공간의 연출, 조명과 효과음의 사용 등에 다양한 창의력이 개입되어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것이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내 역할에는 많은 창의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무대에서나 현실에서나 휠체어를 타는 소녀였다. 사고를 당하기 전 피겨 스케이터의 모습은 비장애인 배우가 재연했다. 장애인 극단의 궁극적인 과제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우리가 맡지 못했던 역할, 휠체어를 탄 줄리엣이나 뇌성마비 장애인인 햄릿이 무대 위에서 위화감 없이 더없이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빛날 수 있게 되는 것. 창의력 있는 연출과 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능동적인 에너지를 통해, 장애인 배우들이 한계를 뛰어넘고 주인공으로 우뚝 서 도약하는 것. 장애인 배우의 사회 참여와 연극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두 개의 지향점은 새로운 상상력 속에서 무리 없이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연극을 통해 도약을 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긴 연극 스토리에서 이제 막 두 서너 개의 씬을 넘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긴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때 들려오는 환호와 갈채, 내가 흘리는 진심어린 눈물들이 그 도약들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또 하나의 씬이 끝나고 조명이 아웃되었다. 어두운 무대에 서서 눈부신 다음 씬을 준비한다. 조명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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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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