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

은영과 현일이형! 둘은 닿지 않는 연정이었고 나누지 말았어야 할 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학원 근처에서 검은 자동차가 주위를 맴 돌았다. 은영의 가족이 그녀를 보러 오고는 했다. 은영은 찾지 말라 했다. 티격태격 말을 나누더라는 후배의 말을 홍수는 전해 들었다. 애써 모른 척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술 취한 현일이형이 은영에게 행패를 부렸다. 홍수는 짐작하고 있었다.

“형 이러면 추해지니 그만 하세요!”

후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던 현일이형은 홍수의 만류만은 받아들였다. 검은 자동차는 은영만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경남의 가족은 현일이형과 형이 꾸리고 있었던 학내 조직을 경찰에 신고 했다. 몸도 불편한 사람이 넘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저주와 함께….

형은 한 달여를 빵(감옥)에 살고 나왔다. 영민했던 형은 조직을 은폐했고 그만 빵을 살았다. 은영은 형을 찾아 몇 번을 면회를 갔다. 형은 외면했다. 은영은 무던히도 형을 찾았다. 닿지 않으니 은영은 눈물만 흘렸다. 며칠을 곡기를 끊고 울기만 했던 은영은 나머지 몇 달만 학원에 머물겠다며 가족에게 형의 석방을 원했다고 했다. 몇 달간 보이지 않게 후배들과 동기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농성장을 치우고 집회가 끝날 시간이면 형이 끌었던 리어카는 그녀의 손끝에 있었다. 후배들의 밥을 챙겨먹이던 형에 일은 은영에게 넘어 왔다. 어느덧 2학년이 된 그녀는 후배들과 동기들에게 누이 같았다. 그들의 이후 삶의 양분이 되어 줄 초아를 그녀는 그들의 마음의 땅을 갈아 심고 있었다.

형은 출소 했다.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를 잡아넣었던 정보과 형사는 두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다시 보지 말자!’ 그것은 또 다른 협박이었다.

“형사님! 거칠게 만나게 되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 와중에도 형은 형사에게 오히려 협박을 건네고 있었다. 빵에서 입고 있었던 때에 절은 내복은 홍수에게 건넸다.

“야! 같은 병신이라고 니가 제일 궁금하더라!”

그것은 구라였다. 짧고도 길었던 빵에서의 한 달은 마침 추운 겨울이었다. 형의 추운 다리가 걱정됐던 은영은 제일 먼저 내복을 차입으로 넣어 주었다.

형이 내복을 홍수에게 넘긴 것은 은영과 단절하고자 했던 암시였다. 은영과의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라는 의중을 홍수에게 보냈던 또 다른 신호였다. 그 많은 사람들은 은영만 뒤로 한 채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영은 형의 외면에 아파했다. 가족이 저지른 일은 학내에 퍼져 은영은 마귀취급을 받고 있었다. 홍수는 애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동지는 더더욱 아닌 어설픈 모양새로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서글픈 현실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은영과 형은 아픈 시간을 각자의 공간에서 보내고 있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홍수가 보기에는 은영이 더 외로워 보였다. 더욱 치열하게 청춘을 살아내고 있는 형에 비해 그녀는 붙잡을 그 무엇도 없었다. 멈춰 선 시간 내내 은영에게는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따뜻한 정서만 같았을 뿐 치열한 청춘의 삶의 궤적에서 그녀가 머물 곳은 없었다. 따뜻한 정서의 마지막이라 하여 사람을 챙기려 했으나 챙겨야 할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그녀는 학원을 떠났다. 마지막은 홍수만 있었다.

“야! 함 안아 주라!” - 은영은 울 힘도 없어 보였다.

“니네 식구들 한테 맞아 죽는 것 아니냐!” - 홍수는 낮술에 취해 있었다.

“지랄 하지 말고….” - 은영은 희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울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 홍수는 집회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경찰은 사람들을 몇 겹이나 싸고 있었다. 누군가 길 건너편에서 홍수의 이름을 몇 번이나 외치고 있었다. 전경들에게 가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은영 같았다. 그 먼 거리에서도 그녀는 울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만일 은영이었다면 왜 울고 있는지 홍수만 알 일이다. 명동 성당 멀리서 소리치며 홍수를 찾았던 그녀가 은영이었는지….

지금도 홍수는 알지 못한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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