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집에서 카운터를 보는 류철수씨.

그러다가 소라다방 근처에서 여동생 친구를 만났다. 여동생이 서울 숭인동에 산다는 것이었다. 소라다방 마담에게 차비 1000원을 빌렸다. 오후에 부산진역에서 출발하는 12열차 비둘기호 차비는 690원이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변변한 외투하나도 없었기에 새벽 4시 용산역에 내리니 얼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다방에 들어가 웅크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물어 물어 숭인동을 찾아가니 어머니는 신설동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다. 식당 부근은 가구골목이었다. "우리 아들이 몸은 이래도 손재주는 좋다." 어머니는 식당 손님들에게 아들을 자랑했고 얼마후 나전칠기 농방에 견습공으로 취직을 하였다.

나전칠기 기술은 최소한 3년쯤 되어야 자개를 자르는 톱질을 한다는데 그는 3개월만에 톱질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잡초처럼 살다보니 무슨 일이든지 빨리 배웠고 사람들도 잘 사귀었다. 자개농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라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의 경력을 조금씩 부풀려졌다. 경력만큼 월급도 많았던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나면 친구들과 신설동 음악다방에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친구가 옆자리 아가씨를 가리키며 "니 저 아가씨 꼬실 자신 있나?"며 맥주 10병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는 아가씨를 꼬시는데 성공했다. "3개월만에 아가씨집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병신이라꼬 절대로 안 된다 합디다." 아가씨를 납치를 하다시피 하여 부산으로 내려 와서 한달을 개기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동거를 시작했다. 아들 둘을 낳았고 나전칠기 공장도 차렸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일본사람을 만났다. 일본에는 대부분이 개인불당을 모시기 때문에 나전칠기로 장식한 황금불당을 만들자고 했다. 기술제휴를 하면 대박이 터질 거라기에 원가로 황금불당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기꾼이었다. 공장은 부도가 났고 아내는 떠났다. 해운대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희망이 없어 보였다. 바다로 뛰어 들었으나 누군가에게 끌려 나왔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것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남의 공장에 들어갔으나 이미 자개농이 한물 가고 있었다. 카이로프락틱(Chiropractic)과 활법을 배웠다. 나전칠기를 배울 때도 그랬지만 활법도 금방 익혔다. 어머니는 식당을 그만두고 압구정동에서 하숙집을 하면서 손주 둘을 키우고 있었다. 집에서 주변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자 그가 손만 대면 디스크고 관절염이고 다 나았다. 어릴 때 팔 힘을 기른 탓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 무렵 아버지가 찾아 왔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했고 198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연산동 셋방에 살면서 서면에 활법원을 차렸다. 그러자 안마사협회 맹인들이 몇십명씩 쳐들어 와서 다 때려 부셨다.

의료법에는 남의 병을 고쳐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의사와 맹인안마사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장소를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맹인들은 또 찾아 왔다. 안마사협회와는 맹인안마사를 한명 고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구청 위생과에서 찾아오고 보건소에서 찾아오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걸핏하면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고 재판 받고 벌금 물고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생활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서면에서 활법원을 할 무렵 근처에 친구 사무실이 있어 가끔 들려서 고스톱을 치곤 했는데 경리 아가씨가 심부름을 해주곤 했다.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고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았지만 그 아가씨가 지금의 아내 장00(44)씨다. 어머니는 연산동에 칼국수집을 차렸고 아내는 아들 둘을 키웠다.

활법원을 몇군데나 옮겨 다니면서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허리디스크가 나은 손님이 병을 고쳐 준 보답으로 35평 아파트를 헐값에 제공해 주었다.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부터는 별로 쫓겨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20여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다보니 팔에 무리가 왔는지 더 이상 치료를 할 수가 없게 되어 3년전 활법원은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칼국수집은 번성하였다. 활법원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칼국수집 근처에 칼국수집을 하나 더 차렸다. 칼국수집 개업날 노숙자들이 몰려와서 칼국수를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멀쩡한 놈들이 어디 병신한테 와서 행패냐"고 호통을 쳤더니 "어! 절룩발이네"하면서 도망을 치더란다.

직장생활을 하던 두 아들도 지금은 칼국수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작은아들은 어머니집에서 큰아들은 그의 집에서 일을 한다. 작년 여름 휴가 때는 아내와 함께 몰디브 여행도 다녀왔다. 몇군데 장애인단체에 참여도 하고 쉬는 날은 친구들과 낚시도 하러 간다.

"젊은 시절 하도 배를 골아서 삼시세끼 밥만 안 굶으면 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의 남은 인생도 남부럽지 않게 순탄하기를 빈다.

류철수씨의 삶(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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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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