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름 지리산에서 류철수씨.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신이 어렸을 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다고 하자 아들의 대답이 '라면 먹지'했다던가. 물론 그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는 라면도 없었지만 있었다해도 사먹을 돈도 없었으리라. 라면은 1959년 일본 명성식품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우리나라는 1963년 삼양라면이 시초였다.

류철수(53) 그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배가 고팠고 항상 허기가 졌다. 그래서 지금도 아들들이 노는 꼴은 절대로 용서를 못한단다. 아들들이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애비는 몸이 이래서 노가다도 할 수 없어서 굶어야 했지만 너거는 몸 건강하니까 노가다라도 해서 먹고살라"며 쫓아냈다는 것이다.

류철수씨는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아버지 류00(작고)씨와 어머니 차00(78)씨 사이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번도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멋진 양복에다 백구두를 신고 다니는 멋쟁이였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한량이라 불렀으나 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 속만 썩히는 못된 남편에다 자식까지 돌보지 않은 무정한 아버지였다.

3년전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니가 불구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천시했는데 병신자식 효도한다더니 니가 이래 효자질 할 줄 몰랐다. 이 애비를 용서해 다오"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오랫동안 간경화를 앓고 계셨는데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약도 드시지 않으셨고 그 멋진 옷이며 구두며 당신이 쓰시던 물건들을 주변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시고 입은 옷 외에는 유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에게 몽둥이로 맞았다. 친구들에게도 병신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어쩌다 친구들과 싸우다가 친구들이 그를 때리고 달아나면 다리가 부실한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던 중학교 2학년 무렵 자신의 부실한 다리를 보완하기 위해 팔 힘을 기르기로 했다. 누구든지 잡히기만 하면 한방에 보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돌덩이 역기를 만들어 밤마다 마당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밤 마당에서 역기 훈련을 하고 있는데 소피를 보러 나왔던 아버지가 그를 보고는 "이놈의 새끼 병신 달밤에 체조하냐"며 다짜고짜 몽둥이로 그를 때렸다. 그날밤 아버지는 미친 듯이 그를 때렸는데 그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이를 악물고 고스란히 매를 맞았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스스로 겁이 났던지 때리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그날 밤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마지막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다시는 그를 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왜 그를 때리는지 알지 못했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미웠고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20년이나 아버지를 모시기는 했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들에게 용서를 빌며 조금이라도 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주변정리를 하고 남몰래 장례비용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알고는 목이 메었다.

그의 아버지가 밖으로만 돌았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구제품 장사를 비롯해서 풀빵장사 화장품 장사 등 별의별 장사를 다하셨다. 그가 세 살 때 소아마비가 그를 덮쳤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길이 없고 어머니는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했으므로 보통의 부모들처럼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기억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하셨으므로 그의 병은 전적으로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병에 매달려 온갖 처방을 다했다. 그럼에도 그는 온갖 병을 달고 사는 약골이었다. 세살 때까지 잘도 뛰어 다녔다는데 다시는 뛰지 못했고 목발없이는 걷지도 못했다. 류철수씨의 삶은 (2)편에 계속

#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