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정화원 신부 이희숙의 경주 불국사 신혼여행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삐이익 삐이익 안마피리를 불며 골목길을 누비다가 손님이 부르면 안마를 해주고 몇 푼 사례비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죽어도 안마피리를 불기는 싫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해서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했고 두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했다. 그를 길러주신 아버지는 몇해전 돌아 가셨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으나 이료(理療)과목 만큼은 열심히 배웠었다. 어머니에게 침을 놓겠다고 하니 이웃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 왔다. 며칠 침을 놓으니 환자들이 나아서 어느 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리가 아프다는 한 아가씨가 찾아 왔다. 몇년동안이나 유명한 병원은 안 가본 곳이 없었다고 했다. 더구나 그녀는 기독교 집안이었는데 귀신이 들렸다고 굿을 했을 정도였고 그를 찾아 왔을 때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다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진맥을 해보니 척추전방위증이었다. 두달쯤 치료를 하니 다 나았다. 그녀의 오빠가 고맙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가씨를 며느리 삼고 싶어했다. 그도 별로 싫지는 않았기에 좋다고 했다. 그 아가씨가 그의 아내가 된 이희숙(52)씨다.

그가 환자를 고쳐서 결혼을 했다는 소문은 전설처럼 퍼져 나갔다. '괴정에 용한 봉사 침쟁이가 있는데 앉은뱅이를 나사갖꼬 결혼을 했단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렸단다.'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괴정의 봉사 침쟁이'를 찾는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돈이 모이자 땅을 사기 시작했는데 눈감은 한계인지 때로는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불법 침술이라고 신고가 들어가는지 경찰서나 보건소에서 빈번하게 찾아 왔고 그때마다 손님을 둔 채 경찰서나 검찰로 불려 갔다. 그의 아내는 양복 입은 사람만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해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2001년 전국장애인경기대회에서 성화봉송하는 정화원씨

참다못한 그가 서울로 가서 동료들을 모았다. 학교에서는 이료과목이 있어서 해부생리 한방침구 등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2000여시간이나 배운다. 문교부에서 인정하는 교과목을 보사부에서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렇게 시작된 맹인침사합법화 운동은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1981년 '한국맹인침사협회'를 발족하고 그는 부산경남지부장을 맡아 투쟁하였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장애인복지운동에 뛰어 들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과 정보라는 생각에 1983년 자비를 들여 동구 수정동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부산맹인점자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85년 이름뿐인 맹인복지회 사무실을 마련하였으며, 1991년 10월에는 구포에 부산맹인복지관을 개관하였다.

이렇게 맹인복지운동을 해 나가면서 시각장애인들만으로는 법적 제도적 불이익을 타개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전체 장애인들이 합심하여 장애인의 권익을 향상시키고자 1987년 12월 12일 '장애인의 권익은 스스로 찾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장애인연합회(부산장총)를 출범시켰다.

부산장총에서는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 제정에서부터 수많은 장애인관련 제도나 정책을 건의 개선하였다. 보철용차량에 대한 각종 세제혜택 전화료 유료도로통행료 수도료 등이 감면 내지 할인되었다.

자신의 돈을 은행에 맡겨도 이용할 때마다 푸대접과 냉대를 받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1990년 4월 20일 부산장애인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부산장총에서 1종 운전면허 취득 투쟁을 할 때 그는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잘 안다. 눈감은 내가 운전면허를 준다고 해서 운전을 하겠는가' 1994년 많은 장애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1종 운전면허가 허용되었다.

부산장총 설립이 시각장애인의 한계에서 벗어나듯이 전체장애인의 권익을 위해서는 지역연대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1993년 광주장애인연합회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현재는 서울에 거대단체가 두개나 설립되었으니 청출어람이랄까.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선거 때마다 장애인정책이나 공약을 요구하며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가운데 1998년 부산광역시의회에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번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독서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녹음도서가 쌓여 있다. 그리고 낚시와 친구들과 잡담하면서 술마시는 것을 즐긴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 세가지 취미를 제대로 못 누릴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그는 20여년동안 장애인복지운동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모두 그가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부산의 40만 장애인 나아가 전국의 장애인들이 힘을 모아 주었기 때문이다. '완전참여 완전평등'을 위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데 함께 이루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주어야 할 것이다. 끝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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