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 설치중인 CDS드라이빙 컬럼엘리베이트 앞에 선 김광표씨.

김광표(41살) 그는 지체 2급 장애인이다. 그는 대체로 웃고 산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별 어려움 없이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줄 것도 아닌데 찡그리면 뭐 합니까. 즐겁게 살아야지요.'

장애인으로 40년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터득한 삶의 철학이다.

그는 6.25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김영팔(76세)씨와 어머니 이송춘(67세)씨의 사이에서 2남 2녀의 둘째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는 너무나 잘생기고 탐스러워 주변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는데 어느 날 11살짜리 친척 누나가 귀엽다고 어르다가 아뿔싸! 그만 축담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단다. 첫돌을 앞두고 있어 자박 자박 걷기 시작하던 그는 며칠 후 걸음을 떼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부모님은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척추에 마비가 온 후였다.

소아마비는 바이러스에 의한 급성 전염병으로 주로 척수(脊髓)의 전각(前角)을 침범하는데 1주일 정도의 잠복기가 지나면 39℃내외의 고열이 나고, 구토, 설사, 복통, 경련 등으로 대단한 고통을 받게 되지만 의식을 침범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 뇌성마비와는 다르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소아마비가 유행하였으나 1962년에 백신이 도입 된 이후 소아마비는 급격히 줄어들어 1984년부터는 보고 된 사례가 없다고 한다.

여느 장애인의 부모들도 다 그렇겠지만 돈과 시간과 정열 등 온갖 것을 아들을 위해 쏟아 부었으나 부모님의 애타는 정성에도 아랑 곳 없이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 당시 부모님은 양정에서 고물상을 하며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했으나 그의 치료비를 대기에도 부족하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돈이 모아지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들을 들쳐 없고 용하다는 병원이나 점쟁이를 찾아 다녔던 것이다.

부모님이 그렇게 고물상에서 고생하는 동안 다리를 잘 가누지도 못하는 그는 세살 위인 누나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눈물과 한탄 속에서 세월은 흘러갔고 그는 차도를 보이지 않은 채 나이를 먹었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은 고물상을 정리하고 서면에 인견사대리점을 차리고, 집도 전포동으로 옮겼다. 전포초등학교 부근에다 집을 얻기는 했으나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학교에 보낼 것인지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하여 동생을 돌보아 온 누나는 '걱정 없다. 내가 업고 다닐 끼다'며 부모님을 안심시켰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는 공부는 제법 잘 했으나 다른 아이들처럼 밖에 나가 놀 수가 없었기에 집안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렸다. 동네 아이들이 그의 손재주를 알고는 부서지거나 고장 난 장난감을 곧잘 가져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를 대표해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가고 학예회에서 독창도 하는 등 학교에서 인정받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낼수록 그는 김광표가 아닌 '앉은뱅이' 또는 '병신'으로 불려졌다.

그것은 치욕이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치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걸을 수가 있을까' 그가 걸을 수 없음은 다리에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으로 다리에 힘을 받혀주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드디어 실험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물색하던 중 연탄난로 연통을 구해 길게 반으로 잘라 왼쪽 다리에 대고 붕대로 감았다. 소아마비는 두 다리를 다 덮쳤으나 왼쪽 다리가 더 심했던 것이다. 그러고 걸어보니 다리에 힘이 되었다. 직접 만든 연통 보조기를 하고 목발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어린아이처럼 걸음마를 배웠다.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며 연습한 끝에 드디어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고 더 이상 누나 등에 업히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이 만든 연통보조기를 하고 다니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보조기상에 가서 정식 보조기를 맞추었다. 그 때의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라고 했다.

김광표씨의 삶은 (2편)에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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