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 위를 기어 행진했다. <에이블뉴스>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의 총 연장은 약 1km. 차량 제한속도는 시속 60km로 1분이면 건널 수 있는 거리지만 지난 27일 오후 중증장애인들이 한강대교 북단에서 다리 중간지점에 조금 못 미치는 노들섬까지 기어서 행진하는 데에는 무려 6시간이 걸렸다. 낮 2시경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시작한 행진은 저녁 8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장애 정도와 유형에 따라 중증장애인들은 기는 모습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무릎으로 기어가는 사람, 엉덩이를 바닥에 끌고 양팔로 가는 사람, 바닥에 엎드려 온 몸으로 기어가는 사람 등. 가다, 쉬었다를 반복하며 1시간이 지나자 중증장애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결국 5시 50분경 최진영씨(뇌병변장애 1급)가 탈진해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뒤를 이어 박현씨(지체장애 1급)와 이승연씨(뇌병변장애 1급)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참가자 일부는 손바닥이 까지거나 발톱이 빠져 나갔다. 바지 무릎 부분도 다 헤어져 구멍이 났다.

4시간이 넘게 행진하다 탈진해 결국 전동휠체어에 오른 장애여성공감 박김영희 대표는 “10년을 신었지만 하나도 닳지 않았던 구두가 몇 시간 만에 다 떨어져 더 이상 신지 못할 상태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이날 중증장애인들이 행진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오로지 활동보조 제도화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활동보조 제도화를 위한 중증장애인들의 열망 분출

이현준열사추모사업회 오영철씨는 “중증장애인에게 기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보행과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집 안에서만 보행했다.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다른 모습의 보행이고,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한강대교 위를 기어가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오씨는 “여기 있는 중증장애인들은 수십 년 동안 집안에서, 시설에서 기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아픔, 절망 등을 이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왜 활동보조가 필요한 것인지를 세상에 천명하고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알리기 위해 노들섬을 향해 끝까지 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들섬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모습. <에이블뉴스>

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서기현씨는 “길에 나와 긴다는 것은 아프기도 하고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명박 서울시장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 서울을 치장하는 일에는 수백억을 쓰면서 중증장애인들의 생존권 요구에는 그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쓰지 않고 있어, 이것에 항의하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하고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현 정책국장은 “중증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화장실도 갈 수 없고, 휠체어에 올라탈 수도 없다. 활동보조인이 없이 집 밖으로 나오려면 이렇게 기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서울시와 정부, 그리고 우리사회는 중증장애인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 체면도 포기하고 기어가는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장연(준)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위원회 양영희씨는 “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 제도화라는 생존권적 요구를 하며 삭발을 감행했음에도 서울시의 입장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삭발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가 가진 본래의 모습들을 드러내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세상에 보이자고 결심하게 됐던 것은 그만큼 활동보조 제도화가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싸움은 자기 권리 내세우지 못하는 장애인들 위한 것"

기어서 행진할 수 있는 몸의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은 휠체어를 탄 채로 참가했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이광섭씨는 “나도 행진을 하고 싶지만, 내 장애특성상 전동휠체어에서 내려 길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씨는 뇌병변장애 1급으로, 지난 2004년 휠체어리프트 추락 사고를 당해 현재 혼자서는 목과 얼굴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 이씨는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행진을 함께 했다.

이양신씨(사진 왼쪽)는 전동휠체어에 탄 채로 행진을 함께 했다. <에이블뉴스>

목뼈를 다쳐 장애를 입은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용기(지체장애 1급) 소장은 ‘왜 참가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저렇게 길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답했다. 최 소장은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사회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모습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지자체는 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행진을 끝까지 함께한 이양신(지체장애1급)씨는 “지나가는 시민들이 시민의 발을 묶으면 어떻게 하냐, 길에 갇힌 사람 중에는 아픈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며 우리를 비난한다. 비장애인들은 언제나 당연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많은 수의 장애인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지금도 방안에서 죽어가고 있다. 지금 이 싸움은 여기 나와 있는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집구석에서 숨죽여 살아가는 중증장애인들의 권리를 알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우리 사회 사람들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나이를 먹으면서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것은 그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가 오페라하우스 짓는데 7천억원을 쓰면서 장애인의 생존이 달린 자립생활을 위해서 2억7천만원을 쓰는 모순된 모습을 보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활동보조, 조례로 제정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서울시는 지난 26일 전장연(준)의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요구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활동보조 서비스가 필요한 대상에 대해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활동보조가 시급한 장애인을 위해 30억의 예산을 편성해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행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참가자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에이블뉴스>

하지만 전장연(준)의 가장 핵심적인 요구안인 ‘활동보조 제도화를 위한 조례 제정 약속’에 대해서는 “활동보조인 제도화만을 규정하는 조례제정은 장애인복지 내용이 자립생활센터 중심의 다양한 서비스가 필요한 현 단계에서 시기상조”라며 “관련법 개정 후 조례제정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원교 소장은 “서울시는 활동보조서비스에 대한 아무런 법적 근거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혜와 동정의 떡고물로 30억을 던져주고 나머지 책임을 정부로 미루려 하고 있다. 활동보조가 제도화되지 않으면 30억 예산이 계속 지원된다고 보장할 수 없고, 관련법이 개정되면 조례제정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은 법 개정이 안 되면 활동보조를 제도화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활동보조서비스가 중증장애인의 권리로 제도화되지 않고, 자립생활센터의 사업이나 복지 서비스 차원으로 지원된다면 장애인은 영원히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자립생활센터에 대한 지원은 활동보조 서비스가 필요한 대상에 대한 시급한 실태조사와 활동보조서비스 조례 제정 이후에 시행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용기 소장도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됐지만 각 지역에서 조례를 만들지 않아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활동보조 서비스에 대해 정부가 법적 근거를 만든다고 해도 각 지자제에서 조례를 제정해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활동보조 제도화는 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책임을 지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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