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근무하던 학원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을 때 이젠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학원을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틀에 한번이던 수업 시간이 1주에 한번으로 줄었으니, 수입의 감소는 불가피했고, 나가야 할 돈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주중에는 수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구직 사이트를 통해 일자리를 찾아보고 면접을 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건강한 사람을 선호하는 환경 탓에 서류 전형 통화조차 쉽지는 않았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근무를 하는 한 콜센터에 어렵사리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당일 면접관은 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더니 “경력은 있어서 괜찮은 것 같은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뽑는 일이었기에 몸이 불편하니 일도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고, 나 역시 늘 집 앞을 지나다니는 마을버스처럼, 면접 때마다 듣던 레파토리여서 새로울 것도 없었다. “할 수 있다”는 답변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면접은 끝났고, 이틀 뒤 합격되었으니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교육을 받으라는 전화를 받았다.

몸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직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입과, 주말에 학원에서 받는 돈을 모은다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수 있었다. “이제는 좀 여유 있게 지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교육 첫날 첫 출근길에 나섰다.

“이런! 출근길이 만만치 않겠군!”

교육이 예정된 건물로 들어가니 계단에 손잡이가 없었다. 어렵사리 건물로 올라갔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의 이동은, 함께 있던 교육생들의 도움 덕에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미리 “계단을 내려갈 때는 도움을 부탁드린다”는 말을 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음날 무슨 일일 벌어질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튿날, 어제보다 조금 익숙해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육을 받고 있는데 센터장의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센터장이라면 콜센터에서는 가장 높은 직급이다. 며칠 전 면접관이기도 하다.

“왜 교육 시간에 부르는 걸까?”를 궁금해 하며 센터장실로 들어가자, 그는 내게 차 한잔을 권한 뒤 “어려운 결정을 했는데”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생각에는 아무래도 정현석 씨가 여기서 근무를 하는 것이 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것은 알고 있지만, 동료들이 현석 씨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 센터의 전산이 글씨가 작기 때문에 업무를 보시는 데 상당히 힘들 것 같아요.”

콜센타에는 업무를 하기 위한 전산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데, 그 전산의 글씨가 작아 내가 업무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충분히 이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떻게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수습으로 정한 3개월 안에 업무가 힘들어 퇴사하는 직원이 적지 않은 것이 콜센터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나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3개월의 수습기간도 보장받지 못한 것이었다.

또 하나! 그는 센터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곳에 난간이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전산의 글씨 또한 작다는 것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문제로 지적한 계단 역시, 도와줄 사람이 있든 없든, 지금부터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한 조직에서 모든 결정권자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반기를 든다면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그는 나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나는 어차피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이틀분의 교육비는 입금해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 3만원씩 지급되는, 고작 6만원의 교육비는 단순히 돈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 일도 해보기 전에 편견에 깔려 무너진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다시 교육장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면서, 전날 점심을 먹으며 자신도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던 한 동료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자신도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좋은 곳에 다시 취직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도 함께 건넸다.

불과 두 시간 전, 직장인의 입장에서 출근했던 건물을 나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그 일이 있은 지 2주일 후, 다행히 국어, 영어, 수학을 비롯해, 내가 맡고 있던 논술은 원래의 시간을 보장받아 오히려 잘 된 일이 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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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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