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과 수화, 화면해설이 없는 TV는 장애인에게 그야말로 바보상자 일뿐이다. 장애인들이 TV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모습. ⓒ에이블뉴스

제주도에 거주하는 김아무개(청각장애2급) 씨는 제주도 지역 방송사인 A방송사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자막 지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 제21조는 방송사업자가 장애인 시청자를 위해 자막, 수화통역, 화면해설 등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A방송사는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 자세히 알아보니, 장애인 시청자 편의제공을 명시한 장차법 제21조와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200개 방송사 중 장애인 편의 제공하는 곳은 40곳뿐

방송통신위원회 시청자권익과 관계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종합하면, 현재 국내 전체 방송사 200여개 중 장차법 21조가 명시한 장애인시청자를 위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방송사는 40여 곳뿐이다. 지난 2008년 4월부터 법 시행이 되고 있지만 160여 곳의 방송사가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는 40여 곳의 방송사도 모든 프로그램에 자막·수화통역·화면해설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MBC, KBS, SBS, EBS 등 지상파 4곳의 방송사는 자막방송을 전체 프로그램의 80%, 수화통역과 화면해설을 각각 5% 정도 제공하고 있지만, 나머지 방송사는 대개 수화통역만을 제공하고 있다.

김 씨가 시청하는 A방송사도 저녁뉴스시간에 하루 6분 정도만 수화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해 A방송사 관계자는 “자막방송을 하려면 먼저 자막방송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자막방송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쉽지 않고, 작은 지역에서는 속기사를 구하기도 어렵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지역민영방송사가 자막방송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수화통역에 대해서는 “자막·수화통역·화면해설 중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수화통역이다. 현재 저녁뉴스 시간에 제공하고 있는 수화통역은 1분에 9,000원이 소요된다. 정부에서 40%를 지원하기는 하지만, 드라마 등 다른 프로그램까지 수화통역을 확대하려면 부담이 매우 커진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시스템 구축, 비용 문제 등 어려운 점이 많아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지역방송사에서 자막방송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정부에서 이를 위한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는 등 지원을 좀 더 확대해야 자막방송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방송사의 힘만으로 장차법 21조를 현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방송사 특성·수익구조 파악해 실질적 대책 세워야”

장애인계에서도 실제 장차법 내용이 현실화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정부측에 불만이 많다. 장애인정보문화누리의 김철환 활동가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장애인시청자와 방송사의 특성을 파악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연차적으로 늘리며 시행해야 하는데 단기적인 계획만 세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공영·민영방송사의 프로그램 특성, 방송사의 수익구조, 장애인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애인시청자 편의제공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 활동가는 “현실적으로 방송발전기금을 무한정 지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방송, 채널의 특성을 파악하고 각 방송과 프로그램에 따라 얼마나, 어떻게 지원해야 할 것인가를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법적 환경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바로 “장차법과 방송법이 장애인편의제공에 대해 명시한 내용이 서로 달라 방송사업자에게 빠져나갈 길을 제공한다”는 것.

실제로 장차법 21조는 방송사업자가 장애인 시청자를 위해 자막, 수화통역, 화면해설 등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방송법 제69조는 ‘방송사업자는 장애인의 시청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 활동가는 “장차법과 방송법의 관련 내용이 일치하도록 방송법을 개정하고, 방송사가 단계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장애인 편의제공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옥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장차법은 장애인 차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소극적 보장책인데, 정부는 장차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나 예산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며 정부가 장차법 시행을 위해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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