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점방은 내몰라하고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홍한량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 대신 가계를 책임져야 하고 다섯 남매도 돌보아야 했으니 눈앞이 깜깜했다. 더구나 장사밑천인지 노름빚인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던 모양인데 어머니가 안 계시자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아버지를 재촉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식구들이 살 작은 집을 하나 사고, 나머지는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돈을 받지 못했다. 친구에게서 돈을 받지 못해 실의에 빠진 아버지가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자 작은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행님, 그 집이 행님 집입니꺼. 와 행님 마음대로 집을 팝니꺼?”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나서 더욱 더 술에 빠졌고, 결국 알코올중독과 화병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하직하였다.

젊은날의 야유회(오른쪽 뒤편) ⓒ이복남

그가 열 살 무렵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초상을 치루고 그와 동생 둘은 근처 보육원에 맡기고, 누나 둘만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보육원에서는 두 동생과 함께 입고 먹고 자고 학교도 보내주었지만 그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옛날 집 근처에는 회원천이라는 강이 있었는데 날마다 방과 후에는 그 강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노을이 질 때까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곤 했었다. 이제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두 누나마저 없으니 그는 완전히 외톨이 같았다. 그렇게 강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은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잊어버리기도 해서 보육원에서는 그를 찾아서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동생 둘이 있었지만 그도 어린 나이인지라 동생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동생은 뒷전인 채 저녁이 되면 돌아가야 하는 보육원이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결국 보육원에 간지 1년도 되지 않아 보육원을 뛰쳐나온 열한 살짜리 소년의 거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고 닥치는 대로 아무데서나 자고 그렇게 떠돌이 생활로 넝마주이를 하다가 드디어 구두 터 하나를 잡았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이라 영화나 쇼가 유일한 볼거리였기에 주로 극장 앞에 진을 치고 마산의 뒷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되기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악바리로 참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 세계에는 주먹과 깡다구가 최고였는데, 우리들 중에는 큰 깡다구가 있었고 제가 작은 깡다구였는데 사람들은 저를 홍깡다구라고 불렀습니다.”

신마산역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때는 서울에서 삼랑진을 거쳐 마산으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진주방면에서 오는 열차가 있었는데, 신마산역은 두 개의 열차가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열차에서 오징어 땅콩 등 장사를 하는 아이들도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보통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달리는 열차에서 타고 내리기도 예사로 했었기에 열차 또한 그들의 무대였다.

홍금당 도장방에서 ⓒ이복남

열다섯 살의 겨울, 그는 나팔바지에 하얀 농구화를 신고 친구와 함께 신마산역에서 열차를 탔다. 3.15의거 탑에서 강남극장까지는 고갯길이라 열차가 천천히 갔기도 했지만 달리는 열차를 타고 내리는 것은 별 문제도 아니었기에 별걱정 없이 친구와 까불거리다가 3.15탑 부근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렸다.

하필 그놈의 나팔바지 자락이 열차의 어디쯤엔가 걸린 모양이었다. 그의 몸뚱이는 열차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열차바퀴는 그의 오른쪽 다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했고, 몇 군데나 병원을 거친 후에야 구두닦이 합숙소 주인이 보증을 서서 겨우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며칠 만엔가 깨어났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께 뒹굴던 깡다구들은 무서웠는지 겁이 났는지 얼씬도 하지 않았고 다만 마산시청 담당 공무원이 가끔씩 찾아 왔을 뿐이었다. 3개월 후 그의 상처가 굳어질 무렵, 마산에는 그를 받아 줄 장애인 시설이 없다며 그는 부산시로 인계되어 부산의 한 재활원으로 넘겨졌다.

“장애인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재활원에 가 보니 그야말로 별의별 장애인이 다 있습디다.” 재활원에서는 그를 근처 초등학교로 보내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직업 재활원에서 세탁기술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는 발목을 잃었는데 그의 팔자인지 기술 부족인지 잘린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몇 번이나 수술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오른쪽 대퇴부를 잘라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잘린 자리에선 계속 고름이 흐르고 가려웠다. 어느 날 잠결에 잘린 다리를 긁다보니 뾰족한 게 걸렸는데 알고 보니 조그만 쇳조각이었다. 쇳조각을 빼내고 나니 상처도 아무는 것 같아 아미동 아동자선 병원에서 마지막 수술을 하고 재활원에서 의족을 맞추었다.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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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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